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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위 팔방미인,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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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모, 보닛, 브르통, 세일러 햇, 와토, 카우보이 햇, 클로슈, 태머섄터, 탑, 터번, 토크, 티롤모자 등등… 지금까지 나열된 이름은 다름 아닌 모자의 종류다. 모자는 그 종류만 해도 매우 다양하고 각각의 특성과 역할도 개성 넘친다. 야구선수처럼 얼굴로 들어오는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모자를 쓰는가 하면, 조선시대 양반처럼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갓을 쓰기도 했다. 우리는 평소 패션용으로나 감지 않은 머리를 숨기기 위해서도 모자를 많이 쓴다. 모자는 언제부터 썼고, 어떤 형태로 발전해왔을까? 모자에 얽혀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자.

▲홍대거리 모자 상점. 각양각색의 모자가 있다.
▲홍대거리 모자 상점. 각양각색의 모자가 있다.

모자는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있었을까?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모자의 역사는 매우 길다. 기원전 3200년경 이집트 나일강 근처 테베스(Thebes)의 무덤 벽화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남성이 그려져 있다. 일상을 그려낸 벽화에서 모자를 발견할 수 있는 점에서 그 이전부터 사람들에게 모자가 대중화됐음을 알 수 있다.

모자는 ‘커치프(Kerchief)’와 같은 머리를 감싸는 단순한 형태에서 더 복잡하고 정교한 형태로 발전한다. 챙이 달린 최초의 현대적인 형태의 모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이 썼던 운두가 낮은 ‘페타소스(Pethasos)’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동시대에 유행한 삼각뿔 형태의 ‘프리지안 본넷(Bonnet phrygien)’을 현대 모자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중세에는 모자가 여인들의 장식품이 되며 하나의 패션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시대별로 다양한 유행을 거치며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모자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아졌다. 자동차를 탈 때 챙이 큰 모자는 걸리적거리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상황에 맞게 기능을 넣은 실용적인 모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운동선수들이 햇빛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스포츠 모자나 공사장 인부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헬멧이 대표적이다.

 

모자의 나라, 조선

“한국은 모자의 왕국이다.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지니고 있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공기와 빛이 알맞게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되는 한국의 모자 패션은 파리인들이 꼭 알아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를르 비리,『뜨르 두 몽드』

“한국 모자의 모든 형태를 전부 나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 모자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하여 약 4천 종에 달할 것이다.” 앙리 갈리,『극동전쟁』

 

▲조선시대 광화문 앞 풍경. 모자의 모양으로 신분을 알 수 있다./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네이버 공식블로그
▲조선시대 광화문 앞 풍경. 모자의 모양으로 신분을 알 수 있다./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네이버 공식블로그

모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위의 두 문구처럼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이 조선의 모자 가짓수와 용도에 놀라 ‘모자의 왕국’이라는 표현을 썼으니, 그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조선인들은 성별, 나이, 신분 등에 따라 다른 모자를 썼는데,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모자는 단순한 의복을 넘어 개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모자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검은 갓으로 알려진 ‘흑립(黑笠)’이다. 고려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은 원나라의 관습에서 벗어나고 고유 의관 체제를 갖추기 위해 흑립을 관모로 제정했는데, 이 점에서 흑립은 자주의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양반들에게 흑립이 일반화되지 않았으며, 이전에는 양반은 대나무로 만든 초립(草笠)을 썼다. 조선 후기에서야 흑립은 대중화됐으며, 초립은 성인식을 마친 소년이 흑립을 쓰기 전 착용하는 모자가 됐다. 신분이 낮은 역졸이나 보부상은 주로 패랭이를 착용했는데, 간혹 상(喪)을 치르던 선비들도 썼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 여성이 착용했던 모자는 독특한 기능을 가진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을 5대 덕목 중 하나로 여긴 조선은 남녀 간 내외가 기본이었다. 이 때문에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모자가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너울은 궁중이나 상류층 여성이 외출 시에 착용한 모자이다. 여성 평민 계층은 두루마기와 비슷한 형태의 장옷을 머리에 두르고 다녔다.

방한 기능을 하는 모자의 종류도 다양했다. ‘아양 떨다’는 표현의 어원이기도 한 ‘아얌’은 부녀자들이 쓰던 방한모다. 또한 ‘조바위’는 조선 후기 신분을 가리지 않고 아얌 대신 사용된 방한모로, 어린이용의 경우 화려한 장식이 새겨지기도 했다. 덧붙여 남바위는 풍뎅이를 닮은 남녀공용 방한모로, 남성용은 검은색이며, 여성용은 자주색이나 남색의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조선 백성들은 성인식이나 상례 등 의례가 있는 날에는 특별한 모자를 착용했다. 성인식에서 남자는 ‘상투관’과 ‘망건’을 썼다. 상투관은 상투를 감싸는 관이며, 망건은 상투를 튼 남성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감싸는 망이다. 여성은 쪽을 지고 비녀를 꽂았다. 혼례 때 착용하였던 ‘화관’이나 ‘족두리’를 쓰기도 했다. 조선은 상례 때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흰색 계열의 모자를 썼다. 지금도 한번쯤 미디어에서 본 적 있는 ‘굴건’과 ‘효건’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관료들이 썼던 ‘백사모’, 흰색 갓인 ‘백립(白笠)’ 등이 있다. 

 

머리 위에 놓인 고흐의 표정

 모자는 예술 작품 속에서 인물의 감정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매개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 격으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고흐는 “내 영혼에까지 감동을 주는 것은 오직 인물뿐”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인물화에 애착을 가졌지만, 동생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 1857-1891)에게 돈을 얻어 생활할 정도로 가난했던 고흐에게 모델료는 부담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그의 자화상에는 다양한 모자를 쓴 고흐의 모습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모자는 그의 처지와 상태를 알려주는 일종의 메시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좌),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우)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좌),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우)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1887)과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1887)을 비교해보자. 두 작품은 전반적으로 밝은 색조로 그려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작품의 모자는 다른 느낌을 준다. 고흐는 매우 가난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의가 가득했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1887)의 거친  밀짚모자는 그림에 대한 고흐의 열정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1887)의 회색 펠트는 사색과 회의를 담은 듯한 느낌을 준다. 당시 고흐는 그림에 대한 열의가 있는 동시에 회의감도 가지고 있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팔리지 않는 자신의 그림을 보며 고흐는 불안해했다. 1887년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 “가끔은 이 지긋지긋한 그림에 염증을 느끼기도 한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거친 밀짚모자와 대비되는 부드러운 펠트 재질의 모자에서 그의 고뇌가 잘 드러나는 듯하다.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

다음 작품은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1889)이다. 작품 속 고흐는 붕대를 두른 채 검은 털모자를 쓰고 있다. 털모자의 풍성한 털이 그의 고통스러운 처지와 대비되어 우울함을 부각할 뿐만 아니라 어둡고 차가운 느낌의 검은색 또한 그의 외로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작품 속 고흐가 우울하고 외로운 모습으로 그려진 이유는 작품 창작 배경에 고흐에게 힘겨움을 안긴 사건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공동체를 바랐던 고흐는 아를(Arles)에 ‘노란 집’을 마련하여 같은 인상주의 화가였던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을 초대했다. 고흐는 ‘노란 집’에서 고갱과 그림에 대해 논쟁하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둘은 성격과 회화적 구성에 관한 생각이 달랐기에 다툼이 잦았고, 1888년 12월 23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귀 절단 이후 고흐의 절망적 심리가 투영된 작품이 바로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1889)이다. 고흐가 쓴 검은 털모자는 그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이렇듯 모자의 역사적‧예술적 가치와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양손 남짓한 작은 크기의 모자이지만 그  영향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본인의 개성을 나타내거나 새로운 인상을 줄 수 있는 등 요즈음 모자의 활용도와 가치는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외출할 때 모자를 착용해보며 모자에 숨겨진 가치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인상주의: 있는 그대로의 것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사물에서 작가가 받은 순간적인 인상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미술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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