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기록으로 역사를 만들어가다

아키비스트 김장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당시는 일제강점기 시대였으며, 1920년 2월 23일부터 3월 30일까지 공채관리국과 임시교통사무국 장정 승인을 의제로 제7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회됐다. 같은 해 3월 1일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교민이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2000년생인 기자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과거에 대한 기록(記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와 시민사회, 정부와 정부가 소통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알 수 있다. 김장환 아키비스트(Archivist)는 국회도서관 내 국회기록보존소에서 국회기록물을 다루며, 현재의 기록을 역사로 만들어가고 있다. 기록을 보존하고, 더 나아가 기록을 찾아가는 김장환 아키비스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현재 국회도서관 내 국회기록보존소에서 기록물을 다루는 아키비스트로 재직하고 있다. 해당 직업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생소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아키비스트를 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와 ‘아키비스트’라는 직업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다.

A. 대학생 시절,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시민단체에서 정보공개 운동을 주도적으로 했는데, 당시에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일반 출판사에 취직했고, 우연히 기록연구사 채용 공고를 봤다. 호기심이 생겨 기록관리에 대해 찾아봤더니 예전에 시민단체에서 했던 정보공개와 상당히 관련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입학해 기록학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역사적 가치가 높아 영구 보존하는 기록을 뜻하는 ‘아카이브(archive)’라는 용어가 최근 일반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사용되기는 하는데, 기록관리와 관련된 전문가인 아키비스트는 생소할 것이다. 도서관에 사서가 있고, 박물관에 학예사가 있는 것처럼 아카이브에는 ‘아키비스트’가 있다. 기록을 선별, 수집, 보존하고 서비스해서 기록을 역사로 만드는 사람이 아키비스트다. 한 인터뷰에서 아키비스트를 ‘역사학자와 사서의 한 가운데’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역사학 중 사료학이라는 하위 분과가 있는데, 역사의 기반이 되는 사료(史料)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료가 결국 기록이기 때문에 기록학과 역사학이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한편, 기록을 관리하는 방식은 도서관의 사서와 상당히 유사하다. 즉, 방법론적으로는 도서관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서고 내에 보관된 국회회의록
▲서고 내에 보관된 국회회의록

Q. 국회기록보존소는 국회의장, 부의장, 위원회 위원장, 국회사무처·국회도서관·국회예산정책처·국회입법조사처 등 국회 소속기관이 업무와 관련하여 생산 또는 접수한 기록물을 모두 보존하고 있다. 기록 대상이 광범위해 기록량이 상당할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다보면 보존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궁금하다.

A. 당연히 부족하다. 현재 보존회의록 원본이 약 4천 5백여 권, 의안문서가 2만 5천여 권, 일반 행정 문서가 10만여 권 정도 된다. 또한 전자문서는 100만 건 이상 보관하고 있다. 현재 보존서고의 만고 시점을 2027년에서 길게는 2030년까지 보고 있다. 최근 디지털 기록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국회는 종이 기록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 서고 공간 확충이 필요하다.

또한 최근에는 대부분의 기록이 전자적으로 생산되고, 국회기록보존소에서 보유하고 있는 보존기간 준영구 이상의 기록도 대부분 디지털화하여 전자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전자기록 보존에 대한 문제도 상당히 크다. 예를 들어, 지금 pc에 있는 전자기록들도 사용했던 애플리케이션이 없어지면 열람하지 못할 것이다. 먼 미래에도 지금 만들어진 전자기록을 열람하고 후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므로, 전자기록의 보존과 관련된 시설 혹은 장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현재 서고 공간 확충과 더불어 전자기록의 장기보존을 위한 장비와 시설 문제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Q.국회기록보존소 홈페이지에 다수의 기획 동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시민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인지 궁금하다.

A. 국회기록보존소라는 이름이 상당히 예스럽긴 하다. 국가기록원이나 서울기록원이라는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최근에는 보존을 빼고 다른 이름으로 바꾸는 추세다.

조직이나 기능 출처에 따라 분류하는 ‘기록’은 업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이 검색하고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아카이브에서 기록과 기록을 연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어떤 업무가 수행되면 처음에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고 결과 보고를 하는 것처럼 일의 흐름이 있다. 이러한 ‘맥락’이 있기 때문에 기록을 서로 연결해줄 필요가 있다. 기록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다. 먼저 이 기관에 어떠한 기록이 있는지 숲을 먼저 보여주고, 나무를 찾을 수 있게끔 검색 도구를 개발해서 일반 이용자들한테 제공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기획 동영상과 같은 자료는 기록 정보 콘텐츠라고 부르는데, 기록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가공을 해서 이용자가 쉽게 접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국회기록보존소는 기록도 보존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기록을 잘 찾을 수 있도록 검색 도구를 개발하고,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콘텐츠도 제공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관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관인
▲미국 NARA에서 기록물을 복제하고 있다
▲미국 NARA에서 기록물을 복제하고 있다

Q. 2010년에 국회기록보존소에 입사하며 11년간 아키비스트로 재직했다. 국회기록물을 다루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 궁금하다.

A.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임시의정원 사업이다. 1919년 4월 10일 독립지사 29명이 모여 국회의 전신인 임시의정원을 결성했다.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를 만들고 대한민국 국호를 수립하고 헌법을 만들었다. 임시의정원 마지막 의장을 하셨던 홍진(1877~1946) 선생이 전쟁 중에도 임시의정원 문서를 잘 보관하시다가, 그의 유족이 1966년도에 국회도서관에 기증했다. 그 당시의 기록은 거의 찾기 힘들기 때문에 임시정부 시기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사료다. 또한 2019년에는 임시의정원 100주년을 맞아 홍진 선생의 유족으로부터 국보급으로 평가받는 임시의정원 관인을 추가로 수집했다. 이 기록은 국회도서관 1층의 홍진 선생 기념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에 임시의정원과 관련된 기록을 직접 수집하는 사업도 했다. 국내외에서 포괄적으로 기록을 수집했는데, 나는 미국 담당이었다. 우리나라의 국가기록원에 해당하는 미국의 국립기록관리청에 가서 기록물을 직접 열람하고 복제하는 작업을 했다. 이 경험은 우리 국회기록보존소의 기록 서비스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수집한 기록을 토대로 해제하고 번역하여 해제집도 만들었다. 국회기록보존소 홈페이지에 디지털 아카이브도 구축해서 서비스하고 있다. 

 

Q. 국회도서관에는 말로 개인의 경험을 풀어나가는 구술총서를 발간하고 있다. 김장환 아키비스트도 구술총서를 만들고 구술을 채록하는 사업에 참여했던 것으로 안다. 해당 기록이 역사학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A. 구술은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기술할 수 없는 기층민중을 위한 방법론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엘리트 구술을 많이 하고 있다. 1999년도에 공공기록물법이 만들어졌는데, 그 전에는 사실상 기록이 없는 나라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구술기록은 현대사에 있는 큰 결락 부분을 당시 정치를 하셨던 분들의 기억을 토대로 메꾸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구술기록은 구술자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어 주관적인 의견이 많이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실을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구술집을 만들 때도 녹취문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회의록, 의안문서와 같은 기록을 많이 넣고 있다. 실무적으로 보면, 구술 채록 사업과 구술총서 발간은 별개로 이루어진다. 구술 채록 사업을 먼저 수행하고, 거기서 나온 산출물인 녹취문을 가지고 별도로 구술총서를 만들게 된다.

 

Q.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본교 학우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한다.

A. 나는 일반 사기업도 들어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아키비스트라는 직업을 가지게 됐다. 진부한 말이지만 ‘인생은 속도보다는 방향’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홍익대학교 학우들도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을 텐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먼저 확실히 생각했으면 좋겠다. 당장 ‘특정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공무원이 되겠다’와 같이 눈앞의 목표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확실히 정립하라는 의미다.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고자 하는 지향점이 명확하면 몇 년 후, 혹은 10년이 지난 후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홍익대학교 학우 여러분도 그 길을 잘 찾아가길 바란다. 

SNS 기사보내기

저작권자 © 홍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신기사

하단영역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