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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맹정음, 시각장애인의 세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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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없다고 사람을 통째로 버릴 수 있겠는가? (···) 실명한 이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눈 먼 데다 벙어리까지 되란 말인가.”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시대 속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훈맹정음을 창시한 송암(松庵) 박두성(1888~1963) 선생의 말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인 ‘훈민정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눈먼 이들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인 ‘훈맹정음’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생소하다. 다가오는 한글날과 점자의 날을 맞이해 송암 박두성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훈맹정음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나아가 한글 점자의 표기법을 익히고 오늘날 점자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짚어본다. 시각장애인들에게 한글의 세계를 열어 그들의 세계를 밝혀준 훈맹정음에 대해 알아보자.

훈맹정음이 뭐예요?

훈맹정음의 아버지, 송암 박두성 선생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는 미국인 선교사인 로제타 홀(Rosetta Hall, 1865~1951)이 1898년에 뉴욕 점자를 기초로 창안한 ‘조선훈맹점자’다. 4개의 점으로 구성된 조선훈맹점자는 자모음을 풀어서 썼다. 그러나 이는 우리말 체계와 맞지 않아 익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낯선 체계의 일본어 점자를 익혀야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의료기관인 제생원 맹아부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송암 박두성 선생은 “눈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닫히고 세상도 닫힌다”라고 전하며 1920년부터 한글 점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23년, 그는 제자 8명과 함께 조선어 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한 후, 세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 1809~1852)의 6점식 점자와 한글 창제 원리를 바탕으로 점자를 연구했다. 3년 후인 1926년, 훈맹정음이라 불리는 세로 3개, 가로 2개로 구성된 점자를 조합해 63개 점자를 창안했다. 자음과 모음뿐만 아니라 약자, 문장부호와 숫자까지 점자로 나타냈으며, 그 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한 11월 4일(목), 훈맹정음을 반포했다.

점자로 세상을 읽다

애맹(愛盲)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훈맹정음은 △배우기 쉬워야 할 것 △점 수가 적어야 할 것 △헷갈리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3가지의 원칙을 바탕으로 창안됐다. 덕분에 시각장애인은 쉽게 익힌 점자로 세상을 읽을 수 있었다. 훈맹정음은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사용되며 우리 민족의 세상을 밝혀줬으며 남북한 점자의 통일을 일궈냈다. 또한 지난해 12월, 문화재청은 훈맹정음이 일제강점기에 시각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고유 언어라는 점에서 문화적 가치가 크고, 근대 시각장애 인사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고 판단해 훈맹정음 관련 유물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는 시각장애인 관련 문화유산 최초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한글 점자,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한글 점자의 체계를 알아보자

한글 점자의 체계를 이해하고 사용해보는 것은 시각장애인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한글 점자는 한 칸을 구성하는 점 여섯 개를 조합해서 만드는 63가지의 점형이며 점의 번호는 왼쪽 위에서 아래로 1점, 2점, 3점,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4점, 5점, 6점이다. 또한 글자나 부호를 이중으로 적지 않도록 하나의 *묵자는 하나의 점자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외국어 점자, 컴퓨터 점자, 서양 음악 점자 등 외국에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점자는 한글 점자에서 별도로 규정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한다.

원리를 통해 쉽게 익히는 한글 점자

▲한글 점자표
▲한글 점자표

점자의 점형은 옆으로 풀어쓰는데 초성과 종성을 어떻게 구분해 표기할까? 우선 초성의 경우 ㄱ · ㄴ · ㄷ은 4점을, ㄹ · ㅁ · ㅂ은 5점을, ㅅ · ㅈ · ㅊ은 6점을, ㅋ · ㅌ은 1, 2점을, ㅍ · ㅎ은 4, 5점을 각각 기본점으로 사용한다.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기본점을 사용하여 초성을 제정한 것이다. 이밖에도 ㅇ은 모음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초성으로 표기하지 않는다. 된소리 글자 ‘ㄲ · ㄸ · ㅃ · ㅆ · ㅉ’이 첫소리 자리에 쓰일 때에는 각각 ‘ㄱ · ㄷ · ㅂ · ㅅ · ㅈ’ 앞에 ㅅ의 점형과 같은 된소리 표를 적어서 나타낸다. 

점자는 옆으로 풀어쓰는 특성 때문에 자음의 초성과 종성이 서로 구분되어야 해서 초성과 종성을 좌우 또는 상하로 대칭 이동시켜 제작했다. 그래서 종성의 경우, 초성의 점형이 오른쪽에 위치한 점들로만 이루어졌으면 종성으로 쓰일 때에는 초성의 점형을 왼쪽으로 이동시킨다. 한편, 초성의 점형이 상단과 중단의 점들로 이루어졌으면 종성의 점형은 초성의 점형을 한칸씩 내린다.

▲한글 점자가 풀어쓰기 방식으로 모아쓰기 방식을 구현하는 모습
▲한글 점자가 풀어쓰기 방식으로 모아쓰기 방식을 구현하는 모습

한글 점자에서 모음의 흥미로운 특징은 상단과 하단의 점 중 반드시 한 개 이상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한글 점자는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 묵자와는 달리 초성, 중성, 종성을 풀어쓰기로 나열한다. 그래서 풀어쓰기 방식에서 모아쓰기 방식을 구현하고자 음절의 중심인 모음 표기에 상단의 점과 하단의 점, 왼쪽 열(1, 2, 3점)과 오른쪽 열(4, 5, 6점)의 점 중에서 한 개 이상은 반드시 포함한다. 그리고 첫소리 글자는 오른쪽 열 왼쪽 열의 점 중에서 한개 이상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한 음절은 가운데 칸인 모음을 중심으로 첫자와 받침 글자가 서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ㅏ,ㅑ △ㅓ,ㅕ △ㅗ,ㅛ △ㅜ,ㅠ △ㅡ,ㅣ의 점형은 좌우 대칭, △ㅏ,ㅓ △ㅑ,ㅕ △ㅗ,ㅜ는 서로 상하대칭을 이루고 있다.

 

*묵자(墨字): 먹으로 쓴 글. 점자(點字)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송암박두성기념관을 가다 

 

훈맹정음을 만든 송암 박두성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송암점자도서관 3층에 위치한 ‘송암박두성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주사 앰프로 만들어진 박두성 선생의 사진이 먼저 눈에 띈다. 첫 번째 섹션은 ‘송암 박두성 선생의 발자취’다. 박두성 선생의 사진과 생전에 이용했던 물건을 볼 수 있다. 특히 점자 타자기와 연판의 점자를 종이에 눌러 인쇄하는 기계인 로울러(Roller)가 눈에 띄는데, 이들은 지난해 12월, 훈맹정음과 함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제생원에서 교사로 지내던 시절의 사진. 왼쪽에 흐리게 일본인 교장의 모습이 보인다.
▲제생원에서 교사로 지내던 시절의 사진. 왼쪽에 흐리게 일본인 교장의 모습이 보인다.

두 번째 섹션인 ‘제생원 시절’에는 박두성 선생이 제생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사진 왼쪽 상단에서는 수업을 하는 박두성 선생과 그 뒤에 서있는 일본인 교장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준다는 의미로 함께 찍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제생원에 있던 시·청각장애인의 수는 125명에 불과했으며, 당시 장애인을 위한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국의 모든 시·청각장애인을 교육하는 듯 홍보하는 이 사진은 일본의 ‘보여주기식 작품’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세 번째 섹션인 ‘맹인사업협회’에선 그가 집에서 점자책을 만들고 대출해주던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위쪽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에선 그와 그의 집 대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문에는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당시 박두성 선생은 “인천에 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태극 문양이 그려진 집을 찾아달라고 하라. 그럼 책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시각장애인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글을 몰랐던 당시에 자신의 집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명패처럼 태극무늬를 그려놓았던 것이다. 

네 번째 섹션 ‘점자의 구조와 원리’에서 각종 점자들의 예시와 점자발달사를 살펴 본 후, 다섯 번째 섹션인 ‘한글점자의 우수성’으로 향했다. 점자 표기 방식이 적힌 한글점자 일람표는 송암박두성기념관과 국립한글박물관 두 군데만 존재하며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송암 박두성 선생이 시각장애인을 위해 편지에 넣어 보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훈민정음 해례본의 역할을 하는 한글점자설명서, 박두성 선생이 점자로 제작한 책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점자, 어떻게 표시되고 있을까 

턱없이 부족한 점자표기

우리는 실생활에서 종종 점자 표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점자를 표기하는 곳이 적어 시각장애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턱없이 적고, 올바르지 않은 표기로 불편을 겪기도 한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의 시설 이용 편의를 위하여 건축물의 주 출입구 부근에 점자 안내판, 촉지도식 안내판, 음성 안내 장치 또는 그 밖의 유도 신호장치를 점자블록과 연계하여 한 개 이상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관공서에서조차 점자 안내도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거나 정확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리모델링 등으로 인해 건물 구조가 바뀌어도 점자 안내도는 수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서의 경우 혜화서는 오래전 별관으로 옮긴 교통과가 여전히 본관에 있는 것으로 표기하고 있었고, 중부서는 별관이 3층 건물이지만 2층 건물로 표시돼 있어 3층 정보는 아예 없었다.

또한 의약품은 안전을 위해 점자표기가 필요한 품목 중 하나다. 지난 7월 20일(화), 「약사법」에 신설된 65조 5항에 따르면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정하는 의약외품의 경우 시각·청각장애인이 활용할 수 있도록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정하는 사항을 용기 또는 포장에 점자 및 음성·수어영상변환용 코드 등 총리령으로 정하는 방법 및 기준에 따라 표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의약품에 점자 표기를 하는 제품은 전체 의약품 4751개 중 94개에 불과하다. 약 1.98%에 그치는 수준이다. 식음료도 점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거나 포괄적인 단어로만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음료의 경우, 일부 캔 음료에만 점자가 기재되어있는데 그마저도 ‘음료’, ‘탄산’으로 표기되어 있어 구체적인 맛과 브랜드는 알 수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유통기한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각장애인들은 당연히 제공 받아야 하는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정보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알 권리를 위한 변화의 발걸음

보장되지 않는 시각장애인의 알 권리를 위해 변화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는 시각장애인의 의약품 정보 접근성을 강화하고자 의약품 점자 표시를 위한 예산을 확보할 계획임을 밝혔다. 식약처는 지난 4월 장애인 단체, 제약업체 등과 함께 ‘의약품 점자 표시 등 개선 추진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점자를 표시해야 하는 의약품의 종류와 범위, 점자와 코드 등에 포함되어야 할 의약품 안전 사용 정보의 종류 등을 논의하고 의견을 수렴했다. 식약처의 예산안 확보가 논의되면서 식음료 업계의 점자표기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이트진로의 경우 캔맥주 ‘테라’와 소주 ‘진로’, ‘참이슬’ 제품에 점자를 표기하고 있다. 롯데칠성음료는 생수 ‘아이시스’와 음료 ‘칠성사이다’ 페트병 제품에 브랜드명을 점자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라면과 과자 등의 식품은 포장지가 점자표기에 적합하지 않고 소규모 음료 기업은 음료 용기를 자체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서 점자 표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외에도 많은 식음료 제품 생산 업계는 점자 표기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지만, 생산설비 교체와 과도한 비용 부담 등의 문제로 쉽게 점자표기를 실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업계의 노력만으로는 점자 표기 확장에 분명한 한계가 있어 이에 대해 정부 차원의 금전적, 제도적 지원이 필요한 때다.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어준 점자는 송암 박두성 선생이 애맹 정신을 가지고 한글 창제 원리를 바탕으로 발명한 문자이자 시각장애인들의 글자로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비장애인이 글자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시각장애인도 점자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비장애인의 통행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점자 안내도는 설치되지 않고, 비용을 포함한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식의약품에 점자 표기가 되지 않고 있다. 박두성 선생의 애맹 정신을 본받아 이들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작은 관심부터 가져보는 건것은 어떨까?

 

 

 

김효빈 기자(khbbh2511@mail.hongik.ac.kr)

노소영 기자(0415laura@mail.hongik.ac.kr)

민정범 기자(ffpanda@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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