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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 축제부터 오페라까지 

음악극의 기원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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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원형은 기원전 6세기 후반에 발전한 고대 그리스 비극이다. 음악극, 뮤지컬의 원형도 마찬가지다. 수백 년 동안 그리스에서는 비극이 인기를 누렸지만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기원전 5세기였다. 당시 여러 도시국가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그리스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쳤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70년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르며 경쟁하고 발전했다. 민주주의 제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피타고라스의 수학,  파르테논 신전 등이 이 시대의 유산이다. 

▲디오니소스 극장
▲디오니소스 극장

연극의 기원에 대하여 현존하는 가장 믿을만한 문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리스 비극은 배우들끼리 대화를 하는 대사와 코러스가 춤을 추며 노래하는 합창 송가로 나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중한 아티카어로 쓰인 대사와 도리아어 방언으로 쓰여진 코러스와 디튀람브(Dithyramb)의 쓰임새에 주목했다. 그는 비극 코러스가 디오니소스 축제 합창의 일종인 디튀람브 리더들이 연주한 즉흥연주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디튀람브는 두 개라는 뜻의 ‘dis’와 문이라는 뜻의 ‘thura’의 합성어로 ‘두 번 태어난 자’라는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매년 봄 열리던 디오니소스 축제는 세 명의 시인이 발표하는 비극 경쟁 부문과 비극 공연 전 아테네 10개 부족 간의 디튀람브 경쟁 부문으로 구성되었다. 디튀람브 경쟁을 위해 각 부족은 성인 남성 50명과 소년 50명으로 구성된 코러스를 만들었고 그들이 보여준 공연은 술과 성적인 농담을 좋아하는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는 반인반수의 사티로스 코러스였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다른 도시국가 방문객들이 찾는 국제적인 행사였다. 제국의 도시들은 아테네에 공물을 바쳤고 행사의 목표는 동맹국들이 아테네의 능력과 활동에 찬사를 보내도록 구성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전사자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갑옷을 입게 하여 영웅심을 자극하거나 도시에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공개적인 퍼레이드를 펼치는 방식으로 아테네의 정치권력과 문화적 성취를 과시하는 장치를 곳곳에 배치하였다. 축제와 연결된 연극은 고립된 문화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책무와 신에 대한 경배의식을 담은 정치, 종교행사였고 소수의 예술행사가 아니라 대중행사였다. 디오니소스 연극의 정치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희곡이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이다. <개구리>는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가 최고의 작가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경연을 중심 내용으로 다루었다. 두 위대한 작가의 승부는 디오니소스 신의 심판으로 결정되었는데 그 기준이 당시 아테네 정치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의 여부였다. <개구리>는 당대를 비판한 일종의 정치풍자극이었다. 

디오니소스 축제를 주목한 대표적인 근대 사상가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이다. 그는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에서 균형과 절제, 개별성을 특징으로 하는 아폴로적인 예술과 음악, 서정, 과잉, 일체감을 특징으로 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 상호 대립하고 협력하면서 예술이 발전해왔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비교했지만 사실은 디오니소스적인 예술, 특히 비극의 코러스에 주목했다. 춤과 노래를 동반한 코러스는 관객에게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즐거움이나 슬픔 등 작가가 관객에게 기대하는 반응을 유도하는 행위를 통하여 드라마의 효과를 높였다고 보았다. 비극의 코러스는 디오니소스적 흥분에 사로잡힌 군중의 상징으로 본 것이다. 그리스 후기 이후 코러스에서 배우가 독립되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무대 위 사건의 중심인물로 참여하던 코러스가 점차 해체되었고 코러스의 음악은 장식을 위한 장치로 축소되었다. 흥분과 과잉, 음악의 상징 코러스의 역할이 줄어든 연극 텍스트의 중심은 대사, 즉 문학이 차지했고 공연의 역사는 연극의 역사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이후 로마, 중세를 거치면서 극의 장르는 다양하게 분화되거나 축소되었지만 음악극의 흔적은 막간극이나 교회 신비극 일부에 제한되었다. 14세기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은 악기 반주가 있는 솔로 곡이 그리스 비극 원전에서 설명하는 연주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얻고 고대 그리스 비극을 복원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들의 음악극(drama per musica) 기본 이념은 고대 그리스극이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을 사용했다는데 있었다. 모든 대사는 선율에 실려 가야 하는 ‘음악 작품(opera di musica)’인 오페라가 되어야 했다. 인문주의자 모임인 피렌체 카메라타의 야심찬 연구 성과가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였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바로크 시대 이후 단성음악에서 다성음악으로 변화되고 오케스트라 편성이 커지며 악기가 개량되는 등 음악이 발전하면서 오페라도 화려하고 거창한 음악이 중심에 섰다. 웬만한 유럽의 대도시에는 2천석 규모의 극장이 속속 건립되었고 대형 오페라하우스 관객 대중은 눈과 귀가 모두 즐거운 시청각적 장관을 원했다. 아리아는 화려하고 기교가 많아졌으며 원근법적인 무대 디자인과 날로 발전하던 무대 기계 시스템은 놀랄만한 볼거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몬테베르디에서 스카를라티로 이어지는 바로크 오페라의 인기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쓴 모차르트는 귀족을 조롱하며 프랑스 대혁명을 예고했고 베토벤은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에서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인물을 감옥에서 구출하는 이야기로 시민사회의 시작을 알렸다. 귀족의 후원으로 제작되던 오페라는 롯시니, 베르디를 거치며 현대의 영화 이상으로 인기있는 대중 장르가 되었다. 오페라 가수의 인기는 요즘의 대중가수를 능가했고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독립을 소망하는 이탈리아인의 애국가처럼 극장 바깥에서도 자주 불렸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사실적인 이야기를 강조한 이탈리아의 베리스모 오페라, 거대한 서사를 선호했던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 바그너의 ‘악극 (musikdrama)’ 등 오페라는 지역과 음악적 배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오페라는 그리스 문학의 복원이라는 아카데믹한 목표에서 출발했지만 발전의 동력은 대중의 환호였다. 그러나 거대 서사와 심각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새롭고 난해한 오페라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게다가 19세기 말 벨 에포크 시대 지불능력과 여가 시간을 갖게 된 노동계층이 노래와 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극장을 찾게 되면서 캬바레나 뮤직홀에서 음식을 즐기며 더 편하게 즐기는 다양한 음악공연의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쾌한 오페레타와 질펀한 보드빌, 버라이티쇼의 인기는 20세기 음악극의 제왕 뮤지컬의 등장을 예고했다. 

 

참고문헌 

 

Laura Swift, Greek Tragedy:Themes and Contexts, Bloomsbury Academic, 2016.

 

김광선,『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뮤지컬까지』, 서울:연극과인간, 2009.

 

에드윈 윌슨, 앨빈 골드퍼브(김동욱 옮김), 『세계연극사』, 서울:HS MEDIA,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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