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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감과 두려움에 뒤덮인 청춘을 위해, <버닝>(2018)

진실을 알고 싶은 청춘들에게 분노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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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교사였던 이창동(1954~) 감독은 늦은 나이에 영화 <초록 물고기>(1997)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박하사탕>(1999), <밀양>(2007) 그리고 <시>(2010) 등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영화 <버닝>은 청춘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칸영화제와 대종상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은 소위 ‘좋은 영화’다. 하지만 3명의 주요인물을 중점으로 사건이 시작되며 관객들까지 미스터리한 진실을 찾아야 하므로 ‘어려운 영화’로 꼽히기도 한다. 위 작품은 수많은 메타포를 비롯한 다양한 해석이 있는 거대한 구멍을 가졌다. 감독이 예술적으로 깊게 판 구멍을 무엇으로 메꾸고 덮을지는 다양한 관객의 해석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공간을 보면서 차근차근 이창동 감독이 말하는 청춘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종수: 야, 혹시 보일이도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거 아니야? 너 없을 때 내가 여기 와서 상상 속의 고양이한테 먹이를 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해미: 있지도 않은 고양이한테 밥을 주라고 내가 널 여기까지 불렀다고? 재밌네.

종수: 내가 고양이가 없다는 걸 잊어 먹으면 돼? (절레절레)

춘희 : 네모난 창틀에 보이는 풍경 같잖아.

 

‘종수’는 유통회사에서 일하며 금전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배달을 갔다가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해미’를 만나게 된다. 해미는 종수에게 자신이 아프리카 여행을 간 동안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한다. 여행에 돌아온 해미는 여행지에서 만난 ‘벤’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해준다. 평범하게 살던 종수와 해미의 삶에 침투한 벤은 두 사람의 인생에 균열을 주기 시작한다.

▲종수의 집 주변/출처: @comet_99_movie
▲종수의 집 주변/출처: @comet_99_movie

우선 기자는 파주에 있는 ‘종수’의 집 주변을 방문하여 그의 삶으로 불쑥 들어가 봤다. 그는 멋진 도시의 불빛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다. 평일엔 상자를 나르고, 주말엔 가축을 기르는 종수의 생활은 기자의 일상과 다르지만, 종수도 기자와 마찬가지로 예술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종수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펜을 잡지 않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작가 노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 부모 세대보다 더 못 살고  힘든 최초의 세대다. 지금까지 세상은 계속 발전해왔지만 더는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없다”. 종수는 청춘을 대변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집을 구할 수 없는 금전적 문제도 있다. 하지만 낙엽이 쌓인 캠퍼스에서 웃고 떠드는 청춘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꿈과 희망이 없다. 최근 청춘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더욱 종수처럼 피폐해지고 알 수 없는 분노로 저항하지만,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기자는 종수를 보며 연민보단 우리와 같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벤 : 종수 씨는 무슨 소설 쓰세요? 이런 거 물어도 되나?

종수 : 저는 아직까지 무슨 소설을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벤 : 왜요?

종수 : 저한테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가나아트센터
▲가나아트센터

기자는 ‘벤’이 가족과 점심을 먹었던 가나아트센터에 찾아갔다. 벤은 종수와 다르게 부자인 것이 틀림없다. 종수는 볼품없는 포터 트럭을 몰고 투박한 시골집에서 살고 있다면, 벤은 뻔쩍뻔쩍한 검은 포르쉐를 타고, 몇십억을 호가할 주택에서 지내고 있다. 감독의 말로는 부동산 업자나 투자관리자처럼 적게 일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종수는 그를 ‘개츠비’ 같다고 해미에게 말한다. 『위대한 개츠비』(1925) 속 개츠비는 막대한 부로 매번 파티를 개최한다. 어떤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는지, 어떤 이유로 성대한 파티를 여는지 그리고 개츠비는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이처럼 종수도 벤이 어떤 이유로 젊은 나이에 돈이 많고, 자신과 다르게 여유로운지 궁금해하면서도 질투한다. 벤은 어느 날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고백한다. 종수는 비닐하우스가 메타포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정말로 불타버린 비닐하우스를 찾는다. 벤을 질투하면서 생긴 힘으로 그의 말을 해결하고자 한다. 벤은 아마도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것 같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단편적으로 친구 관계를 맺고 그들을 관찰한다. 무력한 그들을 통해 젊음을 충족하고자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쉽게 흥미를 잃고 하품을 하며 또 다른 젊은이를 찾는 모습에서 말이다. 

 

종수 : 어떻게 하면 저런 나이에 저렇게 살 수 있지? 여유 있게 여행 다니고 포르쉐 몰고 음악 들으면서 파스타 삶고….

해미 : 젊은 나이라도 돈이 많나 보지.

종수 : ‘위대한 개츠비’네.

해미 : 무슨 말이야?

종수 : 뭐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 사람들.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

(중략)

벤 : 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들판에 버려진 낡은 비닐하우스 하나를 골라 태우는 거예요. 두 달에 한 번쯤? 그 정도 페이스가 제일 좋은 거 같아요, 나한테는.

 

▲세 주인공이 만나는 카페/출처: 사진찍는카페찰리
▲세 주인공이 만나는 카페/출처: 사진찍는카페찰리

기자는 ‘해미’가 종수에게 벤을 정식으로 소개해준 강남의 한 카페를 방문해보며 해미를 생각해보았다. 해미도 역시 종수와 다름없이 매장 앞에서 춤을 추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춤은 단순히 홍보를 위한 행위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함이다. 그녀는 재미로 추고 있다고 하지만 일종의 허세이며 벤을 동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종수와의 첫 술자리에서 가상의 귤을 먹는 팬터마임을 보여준다. 팬터마임의 의미는 ‘없는 것을 잊으면 된다’라고 한다. 그녀가 팬터마임을 배우는 이유는 명확하게 자신의 현실을 잊고 싶어 하는 망각의 행동이다. 해미는 꿈도 없고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정신적 가난을 잊어서 해결하고자 하지만, 물론 그런 태도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해미는 실존성에 관해 스스로 질문한다. 그녀가 종수의 집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집중해보자. 해미는 종수에게 아프리카에서 배운 춤을 말해준다. 리틀 헝거(Little Hunger)는 굶주린 사람을 의미하고,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다. 설명 이후 그녀는 춤을 추며 종수가 자신을 이해할 것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그녀의 곁눈질에도 불구하고 종수는 멍하니 있을 뿐이다. 이때부터 그 춤은 감정적인 절망을 표현한다. 해미는 비가시적인 대상을 갈구하면서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해미는 여행을 가면서까지 삶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 이와 반대로 종수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다며 글쓰기를 멈췄고, 벤은 굳이 삶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는 여유가 있다. 해미는 삶의 의미를 모색하는 것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욱 시급하다. 즉, 리틀 헝거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레이트 헝거는 굶주린다.  

해미 : 부시맨들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가 있대. 굶주린 자, 영어로 헝거.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우리가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거를 늘 알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배가 고픈 사람이라고 그레이트 헝거하고 부른대.

 

영화 후반부에선 해미가 사라진다. 어쩌면 종수와 벤에게 음식점에서 한 말을 이룬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종수가 벤을 죽였을까?, 그저 해미가 상실감으로 사라진 것일까?’ 등등 다양한 의문점이 생긴다. 기자는 종수가 진짜로 벤을 죽인 것이 아닌 그녀가 사라진 뒤 이후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왜냐하면, 종수가 소설을 쓰고 있는 장면으로 영화가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종수는 삶의 이유를 알진 못해도 벤과 해미를 만나며 세상을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다. 

 

해미 : 처음에는 주황색이었다가 그다음에는 피 같은 붉은색이었다가 그러면서 보라색? 남색이었다가 그러면서 점점 더 어두워지면서 노을이 사라지는데 갑자기 막 눈물이 나는거야. ‘아, 내가 세상의 끝에 왔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해미일까? 종수일까? 삶의 의미를 갈구하고 있는가? 혹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 낭만 따윈 존재하지 않는 세대들에게 감독은 분노의 대상도 원인도 알지 못한 채 불안과 무력감에 빠진 젊은이들을 걱정하고 있다. <버닝> 속 미스터리함은 사실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초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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