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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의 풀잎들을 위해, <풀잎들>(2018) 

그냥 하나의 풀잎으로 살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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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거리를 걷다 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몇 개 있다. 대부분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다. <북촌 방향>(2011), <선희에게>(2013) 등 홍상수 감독의 많은 영화는 북촌을 배경으로 하고, 나오는 카페나 식당도 겹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새 학기의 파릇파릇한 새싹을 떠올리며 기자는 홍상수의 영화 중 <풀잎들>(2018)을 가져왔다. 탄생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한다. 영화 <풀잎들>(2018)의 풀잎들은 자라나고 있는 것일까 죽고 있는 것일까. 

 

‘저 사람은 오늘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영화에는 다섯의 짝이 등장한다. 그들은 카페 안에서, 혹은 밖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이 열 명의 등장인물을 관찰하고 있는 자가 있다. 바로 극 중 주인공인 ‘아름’이다. 영화는 카페 이드라에서 시작된다. 이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한 공간이 아닌 듯, 화면이 전환되는 순간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는 이들의 공간성과 시간성을 모두 무너뜨린다. 화면이 전환돼도 옆 테이블의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단 한 명, 아름뿐이다.

기자가 도착한 카페 이드라는 영화를 찍었던 18년도의 이드라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익숙한 무지갯빛 책상과 파란색 머그잔은 그대로였지만 구조가 어딘가 달라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페 주인 분께 여쭤본 기자는 아쉬움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 나왔던 골목 안 카페가 아닌, 바로 앞으로 이전을 하신 것이었다. 너무 아쉬웠지만 여기서라도 아름의 기분을 느껴보기 위해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카페 '이드라' 내부와 커피잔
▲카페 '이드라' 내부와 커피잔

 

영화는 ‘미나’와 ‘홍수’의 대화로 시작된다. 처음 둘은 오랜만에 만나는 사이인지 안부를 묻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 중 ‘승희’라는 이름이 등장하면서 둘의 감정은 격해진다. 미나와 홍수는 승희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미나: 난 승희 생각해.

넌 승희 생각하니?

난 승희가 너무 불쌍해.

(중략)

미나 : 난 너 때문에 승희가 죽었다고 생각해!

홍수 : 미쳤구나.

 

둘은 관람객에게 승희가 죽었다는 사실 말고는 다른 정보는 일절 제공해주지 않는다. 화면은 아름으로 전환된다. 아름은 카페 구석에서 글을 쓰고 있다. 기자는 아름의 내레이션을 통해 미나와 홍수의 이야기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가끔 자신을 위해 남을 난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 선택이 훨씬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며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이 대화에서 더 이기적인 사람은 쉬운 길을 택한 미나일까 혹은 모른 척하는 홍수일까.

 

‘친구는 그 죽음의 의미를 찾고 싶어서 저 배우를 족치고 싶은 거고 남자는 두려운 거겠지.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면 뭔가 너무 두려운 게 나올까 봐 죽은 여자는 자살일 거고 죽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나 보다’

 

홍수와 미나의 대화가 끝나면 카메라는 옆 테이블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나이가 조금 있는 두 남녀가 앉아있다. ‘창수’는 ‘상화’에게 갈 데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혹시 방이 남으면 자신이 월세를 낼 수 있으니 함께 살 수 있는지 묻는다. 창수는 최근 자살 시도를 했으며 갈 곳도, 딱히 부탁할 사람도 없는 상태다. 한적한 카페에는 어울리지 않는 웅장한 클래식 음악이 깔린다. 어울리지 않는 음악처럼 심각해 보이는 창수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상화는 단호하며 그들의 대화는 평온하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아름은 둘을 관찰하며 또 판단한다. 기자는 아름의 내레이션이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오직 하루, 저 둘의 대화 내용만 듣고서 저들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돈도, 갈 데도 일도 없는 친구는 있을까? 젊은 사람에게 얹혀살고 싶은 거겠지’

옆 테이블의 손님이 3번 정도 바뀔 때쯤 기자는 커피를 다 마시고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아름과 아름의 친동생인 ‘진호’, 진호의 여자친구 ‘연주’ 이 세 명이 걸었던 북촌 거리를 걸었다. 그들이 밥을 먹었던 식당인 안암골 황태구이 집이 사라져서 기자는 거리를 서성이며 그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름은 진호와 연주의 만남을 마땅치 않아 한다. 그들의 대화 속엔 가시가 있다. 

 

아름과 진호, 연주가 걸었던 북촌 골목길
아름과 진호, 연주가 걸었던 북촌 골목길

 

아름 : 결혼 생각하고 만나는거야?

연주 : 어… 사실 결혼 생각하고 보고 있습니다. 진호씨도 그런 것 같고.

아름 : 근데 얘가 진짜 누군지 모르는데, 그런데 결혼 생각을 해요? 아, 이거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중략)

연주 : 중요한 건… 제일 중요한 건 아는 거 같습니다.

아름 : 그래요? 중요한 건 아세요? 아 그럴까? 그거 쉽지가 않은데.

진호 : 그만하자. 조금 민망해진다.

아름 : 아니, 결혼도 생각하고 사랑도 그렇지만 솔직해져야지, 서로. 결혼하려면 진짜 서로 잘 알아야지.

(중략)

아름 : 모르면 결혼하면 안 돼. 어차피 해도 실패야. 피해 주면 안돼, 사람한테. 사랑한답시고. 사랑은 개뿔.

 

영화 속 대화 위로 깔리는 차분한 아름의 내레이션에 기자는 속았다. 기자는 아름이 객관적이고 냉철한 편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아름의 단편적인 모습만 카메라에 담겼기 때문이란 사실을 이들의 대화 속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아름이 관찰자에서 대화의 참여자로 변하자 그녀 또한 이 영화의 해설자가 아니라 등장인물이자 보통 ‘사람’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지인 앞에선 누구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 된다. 아름은 어떤 경험을 했기에 저렇게 확신할까. 기자는 돌처럼 굳어버린 아름을 생각하며 답답한 마음을 지니곤 ‘지영’이 갔던 카페인 코피발리로 향했다. 

약속이 있다고 떠난 ‘지영’은 한 카페에 도착한다. 잠깐 카페 앞 벤치에 앉았다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내려가고 다시 오르고 다시 내려간다. 지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기자는 카페에 손님이 꽤 있었지만 꿋꿋하게 계단을 오르고 내려갔다. 카메라가 없었다면 이상한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이었다. 지영의 행동은 부정이다. 계단을 오른 것을 부정하고 내려간 것을 다시 부정한다. 지영은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가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거친 숨과 개운한 미소를 내뿜는다. 그 행위를 반복 할수록 지영의 몸은 더 가벼워 보인다. 기자는 이 행위가 자신의 속내를 꺼내 놓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녀의 고민이든 치부이든 간에 말이다. 하나둘 묵혀뒀던 감정을 꺼내 부정하면서 지영은 자유를 얻어 간 것이 아닐까. 지영을 본받아 그곳에서 기자도 한 계단, 한 계단에 가지고 있는 고민과 걱정들을 내려놓고 왔다. 

 

▲지영이 오르락내리락 한 카페 코피발리의 계단
▲지영이 오르락내리락 한 카페 코피발리의 계단

 

영화는 다시 카페 이드라로 돌아가 창수와 성화 그리고 경수와 지영이 합석하며 소주를 마시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미나와 창수는 그들을 흘겨보며 가을밤의 소주에 대해 얘기하고 글을 쓰던 아름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과 함께 소주를 머금는다.

 

“가을밤의 소주가 정말 보기 좋다”

 

이 영화는 풀잎들에 대한 영화다. 죽은 승희를 생각하는 미나와 창수, 자신의 처지를 밝히는 창수와 거절하는 성화, 글을 쓰는 아름, 계단을 오르는 지영, 아름의 동생 진호, 그의 여자친구 연주, 또 본문에서 소개하지 못한 몇 명의 풀잎들이 있다. 아름과 지영에게 공동 집필을 권하는 ‘경수’와 최 교수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재명’과 ‘순영’이다. 풀잎들은 하나같이 나약하며 순간적으로 이기적이고 동시에 안타깝다. 현실에서 한 번쯤 마주했을, 어쩌면 자신일지도 모를 풀잎들이다. 가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생기있기보단 다가오는 겨울에 떨고 있는 풀잎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결국 죽음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인 동시에 낙엽의 계절이기에 죽음과 걸쳐있다. 겨울에 취재를 떠났던 기자는 가을의 죽음을 앞둔 풀잎을 못 본 것이 아쉬웠지만 겨울에도 살아남아 있는 풀잎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떤 풀잎들은 험난한 겨울을 버틸 것이고 그러지 못했다면 따뜻한 봄이 되었을 때 다시 살아날 것이다. 추운 겨울, 외투를 감싸 안고 북촌 거리를 걸으며 기자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지금 버티고 있는지 혹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지. 둘 중 무엇이든 다가오는 봄에는 꽃을 피울 당신에게 풀잎의 삶도 괜찮지 않냐고. 

 

▲영화<풀잎들>장면, 왼쪽부터 창수, 성화, 경수, 지영
▲영화<풀잎들>장면, 왼쪽부터 창수, 성화, 경수, 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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