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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를 위한 이정표: ‘혜원의 집’이 아닌 ‘당신만의 집’ <리틀 포레스트>(2018)

우리는 머물다가 이내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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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8), 출처: 영화사 수박
▲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8), 출처: 영화사 수박

귀농이라는 사회적 트렌드가 부상함은 도시라는 공간이 대중의 일상성을 대변함을 추측하는 동시에,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 줄 별도의 공간으로 시골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그러한 맥락에서 최근 몇 년 사이 귀농을 소재로 한 방송과 드라마가 인기를 끈 한편, 그러한 소재들은 판타지를 자극하기 위한 단순한 포맷, 즉 정착과 적응의 서사로 점철되어 간다. 이는 콘텐츠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응도를 차치하더라도, 귀농에 ‘실패’한 이들이 도시로 돌아오는 현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는 눈밭에 쌓여 꽁꽁 얼어버린 배춧잎부터, 거친 결들 하나하나에서 노력과 땀방울을 보여주는 곶감까지 허기진 영혼을 달래주는 소울푸드이자 ‘힐링영화’로서 대중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한편, 영화는 어딘가로 떠나고픈 관객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에 말미암아 질문한다. 갔다가 돌아올 것인가.

 

▲ 혜원의 집 입구
▲ 혜원의 집 입구

“배가 고파 돌아왔다는 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겨울이 채 가지 않아, 쌀쌀했던 2월의 마지막 일요일, 기자는 영화 속 배경지이자, ‘혜원의 집’이 있는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미성 5길 58-1로 향했다. 모두가 잠든 것 같은 이른 새벽, 완행열차를 타고 낯선 시골마을로 향하며, 긴장과 설렘으로 축적된 피로가 잊힐 무렵, 기자는 ‘혜원’의 귀향길을 상상하게 된다. 영화는 임용고시에 낙방하고, 고된 서울살이에 지쳐가던 혜원이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세세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상한 도시락을 먹고, 함께 시험을 본 남자친구의 합격 소식을 듣던 혜원의 표정에 뒤이어, 곧바로 깊은 밤 고향집에서 잠드는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에 특별한 서사가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어쩌면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피로감과 해방감을 느꼈을 혜원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다. 

 

“배 안 고파요. 안 올걸요.” 

 

혜원이 수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빈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끝내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인정한 그녀의 대사는 더 이상 그녀가 고향집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른다. 이는 그녀가 왜 고향을 떠났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주린 배를 붙잡고,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주방을 뒤적거리지만, 그녀의 행동은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분노와 원망 때문인지 어쩐지 어설퍼 보인다. 그런 혜원이 어느 겨울 눈밭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딘지 모르게 썰렁한 집 안을 성큼 걸어 들어가지 않고, 마루에 누워 고된 피로부터 달래고자 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기자가 그녀의 마음에 얼마나 공감했는지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집이란 공간이 상처 가득한 공간임을, 그리하여 집을 떠나는 이들의 마음이 집으로 돌아온 지금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혜원처럼 마루에 누울 수 없었던 기자는 꽤 오래 대문 밖을 서성였다. 몇 년 전, 기자는 집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도한 바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갈 때면, 어쩐지 성큼 들어가기 어려웠던 그때가 문득 떠올랐다. 

 

▲ 혜원의 집 내부
▲ 혜원의 집 내부

혜원 : 무엇보다 엄마 없이도 혼자서 보란 듯이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 줌 남아있던 쌀도, 더 이상의 밀가루도 없다.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데…”

 

남아있던 장작을 때워, 난로를 지피고, 눈밭에 파묻힌 배추와 파를 살살 파내 고춧가루와 함께 얼큰한 배춧국을 끓여 먹은 혜원은 그제서야 편안한 웃음과 함께 다시 한번 마루에 눕는다. 허기는 외로움과 마찬가지로 주기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다음날 수제비 반죽을 숙성시키는 동안 눈을 치우고, 배추전과 함께 수제비를 먹은 혜원의 앞으로 고향 친구들이 나타난다. 제하와 은숙이다. 

부모님의 농사를 도우며 작은 과수원을 운영하는 제하와 마을 농협에서 일하는 은숙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혜원은 그때부터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한 음식이 아닌, 눈으로 보고, 소리로 즐기며, 입으로 맛보는 음식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시금치와 팥, 치자 등 색색깔이 어우러진 백설기 떡을 보고 있으면, 실은 그녀가 굶주린 것이 그저 푸근한 집밥만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자는 낮은 천장이 주는 밀도감과 함께 아기자기한 집을 살펴보며, ‘혜원의 집’은 곧 사람이 돋보이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성리를 떠나지 않았던 은숙이나, 떠났지만 혜원보다 먼저 돌아온 제하에 비해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드는 혜원이 동등한 눈높이에서 주저앉아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눈다. ‘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심리적 거리감이 좁혀지는 양상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대접하는 혜원은 점차 집의 ‘주인’으로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해당 공간이 ‘혜원의 집’으로 작동하게 되는 계기이며, 혜원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에 더 집중하도록 한다. 

 

재하 : 근데 아줌마하고 다른 게 하나 있네 아줌마 떡 맛은 달지 않은데 단 맛이 나고 너는 짜지 않은데 짠맛이 나.  

 

▲ 엄마가 집을 떠나고 혜원도 곧 집을 떠남을 암시한 영화 속 곶감
▲ 엄마가 집을 떠나고 혜원도 곧 집을 떠남을 암시한 영화 속 곶감

처마 밑에는 모형 곶감들이 예쁜 모빌처럼 걸려 있다. 영화 속 ‘엄마’의 손길이 가득 묻은 주름 잡힌 곶감도, 떠나기 전 새 감을 따 껍질을 벗겨 걸어놓은 혜원의 곶감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주무르다 보면, 겨울쯤에는 진짜로 부드러운 곶감이 되거든.”

 

엄마가 떠나기 전, 고향을 떠나고 싶어했던 혜원이 엄마에게 원망 섞인 투정을 부리자, 엄마가 웃으며 전한 말이다. 엄마가 남기고 간 편지 안에는 엄마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닌, 엄마가 그동안 떠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적혀 있었다.

딸이 곧 제 품을 떠날 것을 직감한 엄마가,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그동안 미루어왔던 여행을 시작하고자 했다는 것. 곶감을 주무르며 겨울을 기다린 엄마의 마음에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걱정과 불안과 함께 딸에 대한 염려가 녹아들어있다. 

빛도 바래고 말랑한 감촉을 잃어버리는 한편, 층층이 더해가는 주름결과 함께 완성되어가는 곶감은 이곳에 없다. 매끈한 모형 감이 실에 매달려,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 어쩌면 이 곳이 기자의 고향이었다면, 기자가 떠나온 집이었다면, 저 감도 바람에 덜 흔들렸고, 더 주름잡힌 모습이었을까. 홀로서기를 준비했던 기자의 등 뒤로 염려와 불안을 숨긴 채, 열심히 무언가를 주무르고 있었을 누군가의 배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엄마의 부엌에서 혜원의 부엌이 된 공간, 방문객들이 남겨놓은 인삿말과 편지는 영화 속 엄마가 혜원을 위해 남겨놓은 편지를 암시한다
▲ 엄마의 부엌에서 혜원의 부엌이 된 공간, 방문객들이 남겨놓은 인삿말과 편지는 영화 속 엄마가 혜원을 위해 남겨놓은 편지를 암시한다

엄마 : 지금 우리 두 사람, 잘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의 출발선에 서 있다고 생각하자.

 

영화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행에는 출발지가 있고, 목적지가 있으며 때로는 경유지도 있다. 우리의 일상 공간으로서 집은 대체로 출발지로 한정된다. 혜원은 집을 떠났고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이내 다시 떠난다. 여행자였던 그녀에겐 집이 출발지이자, 목적지며, 곧 경유지였던 셈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안정감을 주는 ‘집’이라는 공간을 비단 정적인 무대로서 상정하는 것이 아닌, 후천적으로 완성되는 동적 개념으로 바라본 셈이다. 한편, 이 영화는 일상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많은 노마드(Nomad)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기자는 이 영화를 ‘귀농 장려’ 영화로서 해석하고자 하는 일부 작법에 대해 회의적이다. 혜원의 집이 미성리에 위치하지 않았고, 평창동에 위치했다면 <리틀 포레스트>의 주제의식은 달라졌을까. 이 영화는 일상성에 대해 점검하고 있다. 도망치고 싶고, 회피하고 싶을 때, 돌아가야 할 곳을 상기시켜줄 장치로서 ‘고향집’을 사용하고 있을 뿐, 정겨운 콩국수 냄새나, 부엉이 우는소리 따위가 없어도 <리틀 포레스트>는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기자는 해당 영화의 제목에 들어간 ‘숲’이라는 공간을 보다 내밀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외부에 존재하는 별도의 공간이 아닌, ‘자가회복’을 부추기는 내면의 평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혜원의 집이 아닌, '모두의 집'
▲ 혜원의 집이 아닌, '모두의 집'

기자는 영화를 보고 차마 해소하지 못했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혜원의 집’까지 기자를 태워다 준 택시 기사님의 말을 빌려 전하고자 한다. 이 영화의 엔딩은 ‘혜원의 집’을 찾는 사람들과 이들을 바라보는 지역민들의 대담으로 끝으로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택시기사 : 젊은 사람들이 왜 이런 애먼 곳까지 오는 거야? 영화 때문에?

 

혜원의 집은 모두의 집이 되고 있는 한편, 당신의 ‘리틀 포레스트’는 당신 자신만의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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