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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터전과 이념의 싸움터, 『시장과 전장』 (1964)이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 시장을 살펴보다

『시장과 전장』은 1964년 12월에 현암사에서 간행된 박경리의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는 전쟁을 겪는 다수 민중의 삶과 이념적 인물들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작가는 시장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지영’을 통해 시장에서 민중들이 겪는 애환을, 전장에서 이념적 혁명을 꿈꾸는 ‘기훈’을 통해 6·25전쟁에서 나타나는 이념의 대립을 두고 자연스럽게 시장과 전장을 비교한다. 전쟁의 위협이 비교적 사라진 지금, 도시 속 시장의 모습은 어떠한지 의문이 들어 시장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시장은 축제(祝祭)같이 찬란한 빛이 출렁이고, 시끄러운 소리가 기쁜 음악이 되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동화의 나라로 데리고 가는 ‘페르시아의 시장’ - 그곳이 아니라도 어느 나라, 어느 곳, 어느 때, 시장이면 그런 음악은 다 있다. 그 즐거운 리듬과 감미로운 멜로디가, 그곳에서는 모두 웃는다. 더러는 싸움이 벌어지지만 장을 거두어 버리면 붉은 불빛이 내려앉은 목로점에서 화해 술을 마시느라고 떠들썩, 술상을 두들기며 흥겨워하고, 대천지원수가 되어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오다가다 만난 정이 도리어 두터워지는 뜨내기 장사치들.”
 
6·25전쟁 얼마 전, 지영은 기석과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지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형화된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가족에게조차 심리적인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지영은 자신을 둘러싼 현재의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낭만적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지영은 집을 떠나 연안에 혼자 살게 된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우울함에 시달리며 다른 세계에 대해 공상하는 것을 즐긴다. 특히 그녀는 ‘시장’에 대한 공상을 통해 어떤 즐거움을 느낀다. 지영은 시장이란 것을 생각할 때마다 축제처럼 활기찬 분위기를 연상하곤 한다. 전쟁을 겪기 전 그녀의 ‘시장’은 동화의 나라 속에 존재하는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남대문. 사람의 물결 속으로 지영이 휩쓸려 들어간다. 시장에는 골목골목에 상품이 가득 쌓여 있다. 의류, 일상용품, 화장품, 신발 모두 옛날과 같다. 다만 식료품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물건이 가난하다.”

그러나 지영은 6·25전쟁을 계기로 변화를 겪게 된다.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던 연안에서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막막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지영은 가족이 있는 서울로 돌아오게 되는데, 잠깐 들렸던 남대문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지낼 곳이 없어 시장으로 모여들고, 단지 생존을 위해 물품을 팔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에 지영은 다른 세계를 꿈꾸던 낭만적 성향을 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뒤 이에 맞서는 인물로 변하게 된다.
오늘날의 시장은 생존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각 거리의 특색에 집중하고 있다. 시장마다 특색 있는 먹거리가 있고, 특유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기자가 방문한 남대문 시장은 야채호떡이 특히나 유명했다. 호떡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난 후 군것질을 하러 온 학생 무리, 생선가게에서 저녁거리를 사러와 상인들과 즉석으로 흥정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 등의 사람들이 시장을 메우고 있었다. 이처럼 지영이 꿈꾸던 시장의 모습은 6·25전쟁 이후 오늘날에 들어서야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노량진역에 이르는 전찻길은 초라하고 더러웠다. … 전장과 시장이 서로 등을 맞대고 그 사이를 사람들은 움직이고 흘러간다. 사람도 상품도 소모의 한길을 내달리며, 그리고 마음들은 그와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사라져 가는 민심을, 사라져 가는 인민들의 불길을 억지로라도 되살리기에는 오직 승리가, 사람과 상품의 소모를 막아줄 결정적인 승리가 있을 뿐이라고 기훈은 생각한다.”

한편 기훈은 시장과 전장이 모두 소모적인 공간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전장’에서는 인간이, ‘시장’에서는 상품이 소모된다는 것이다. 기훈은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꿈꾸며, 자신의 이상을 세상 속에 실현시키는 공산주의자의 길을 택했지만, 인간 해방이라는 목표가 6·25전쟁이라는 극도로 비인간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아이러니에 봉착하여 고뇌를 거듭한다. 기자가 노량진역에서 나왔을 때, 수많은 고시 학원이 줄지어 있었다. 학원 안 학생들은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노트에 줄을 그려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학원가를 지나쳐 갈 때쯤 중고책방이 눈에 띄었다. 중고책방 안에는 수많은 국가고시 준비 서적들이 쌓여있었다. 누군가는 법 앞에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책을 살 것이고, 누군가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이 책을 팔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치열하게 사는 이들이 가득찬 노량진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놈의 세상, 우리 농사꾼이 밥 달라 했나, 옷 달라 했나! 땅 파먹고 죄 안짓고 조상님네 선영 모시고 자식 기르며 살아왔는데 대국 놈들이나 쳐들어왔다면 몰라도, 이 좋은 땅에 한 물줄기를 타고 태어난 우리 백성들이 서로 잡아 죽이고 뜯어 죽여야 쓰겠소? 대관절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요? 못씁니다. 못써. 사람 죽이는 것만은 안 된단 말이요.”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한다. 그러나 지영의 영역인 ‘시장’과 기훈의 영역인 ‘전장’은 전쟁의 과정을 지나면서 서로 섞이게 된다. 지영은 전쟁을 통해 그녀가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로 환생했던 ‘시장’이 황폐화되는 것을 경험했고, 기훈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지녔던 ‘전장’의 이념에 착오가 있음을 경험하였다. 한편 시장은 일상 속의 공간이지만 전장은 쉽게 경험할 수 없어 극복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그려진다. 오늘날 우리는 의식주의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보다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환경에 대해 환상을 가지거나,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해 좌절하는 경우는 흔히 겪을 수 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는 언제나 ‘전장’이 될 만한 환경이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해야 한다.

조성호 기자  leopard310@mail.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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