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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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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논술 학원에 등록한 첫날, 당시 강사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좋은 글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해?” 대답할 수 없었다. 글에도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을 그 무렵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대답을 회피하고, 우물쭈물하자 다시 한번 질문을 받았다. “그럼 나쁜 글이란 뭐야?” 대답이 명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꽤나 자신 있게 답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글을 쓴 시간 보다 고치던 시간이 더 길었던 이후에는, 나쁜 글은 난도질당한 초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레 원안 그대로 ‘통과’된 초고는 좋은 글이 되었다.
초고를 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공들여 쓴 글을 고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필자가 잔인한 첨삭의 과정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초고를 쓸 때부터다. 한 자 한 자 눌러 쓰던 문장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침없이 백스페이스를 누른다. 빈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가 지난 노력을 허무하게까지 만든다. 논술고사를 준비하며, 육필로 답안을 작성할 때는 책상 한편에 가득 쌓인 지우개 가루와 힘 조절을 못해 찢어지기 십상이던 싸구려 답안지가 아이러니하지만 위로가 됐다. 글을 고치는 행위는 때때로 필자 자신에게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하물며, 타인은 어떨까.
신입 기자들과 함께하는 두 번째 발간을 맞은 지금, 처음 홍대신문에 들어온 때를 반추하게 된다. 그 무렵, 자신의 글이 도마 위에 올라, 심판을 받는 것에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드백이 거듭될수록, 그러한 절차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된다. 상대가 나의 글을 재단하고, 수정을 요할 수 있는 만큼 기량을 갖추었는가. 대학신문의 주요 구성원인 학생 기자들은 현직 기자가 아니다. 일상의 많은 시간을 취재와 기사 작성에 투입하지만, 이들의 본질은 학생이다. 그 점이 즉각적인 수정을 요하는 신문, 특히 학생들이 발간의 주축이 되는 대학신문사의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기자는 ‘나쁜 글’을 썼다는 비판을 피하고 싶었고, 은연중에 첨삭 절차에 대한 비하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끼게 되면, 이에 대해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기자는 글을 아낀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일상적으로 표현하고 싶다. 한편, 내 것을 아끼고자 하는 마음은 그것을 시험하는 외부 요인들에 대한 거센 저항을 동반한다. 이번 1310호의 고정란 ‘영원한 미소’를 취재하기 위해 그림책 작가, 조미자 동문을 만났을 때 우연치 않게 그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남 앞에서 평가받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럼에도 계속 보여줘야 한다.”
‘나쁜 글’을 썼다는 비판을 피하는데 급급해, 평가 그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의 작업물을 불확실성의 잣대 위에 놓아, 심판을 기다리는 것은 작가든, 기자든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다. 한편, 기사는 완성되기까지, 그것이 사안의 본질을 정확히 다루고 있는지,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며, 그를 다듬는 엄격한 준비과정을 요한다. 첨삭과 피드백이란, 대중을 만나기 전, 기자가 날 것 그대로의 평가를 앞서 경험하는 일종의 전초전인 셈이다.
무엇이 좋은 글이고, 무엇이 나쁜 글이냐는 질문을 복기했을 때, 기자의 글에 더해진 수많은 검토와 수정을 상기하게 된다. 하나의 작업물로 완성된 기사 안에는 기자 한 사람의 노력과 함께, 이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취재부와 홍대신문사 구성원들의 조력이 들어 있다. 기자 한 사람을 위해 애쓰고, 힘을 보태던 동료들의 노력을 떠올린다면, 좋은 글과 나쁜 글을 가려내기만 하던 기자 스스로의 과거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필히, 논술학원에서 만난 강사는 기자에게 고치고 다듬기를 반복하며, 하나의 글이 완성되는 과정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누군가의 글을 첨삭하고, 첨언하는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된 기자 역시 홍대신문의 신입 기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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