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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장그래들을 위하여, <미생>(2014)

우리네 삶은 모두 미생(未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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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미생>(2014) / 출처 : tvN
▲드라마<미생>(2014) / 출처 : tvN

미생(未生). 바둑에서 집이나 대마(大馬)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 완생(完生)의 최소 조건인 독립된 두 눈이 없는 상태를 이른다. 『울산매일신문』 2013년 8월호에 실린 문장을 빌리자면 ‘바둑판에서 미생은 한 집뿐인 상태를 말하며 두 집을 만들어야 완생이 되어 살아남을 수 있는 바둑판에서 한 집만 가지고는 죽은 목숨’이라 한다. 드라마 <미생>(2014)은 직장인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뒤늦게 이 드라마에 푹 빠진 기자는 미생이 종영한 지 8년이 지난 지금, 서울 곳곳에 남아있는 미생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원인터내셔널의 촬영지인 서울스퀘어 건물
▲원인터내셔널의 촬영지인 서울스퀘어 건물

처음으로 향한 곳은 주인공 ‘장그래’가 다니는 회사, 원 인터내셔널의 촬영지인 ‘서울스퀘어’이다. 서울스퀘어는 서울역 바로 앞에 있다. 여러 기업의 회사들이 밀집해 있는 곳인 만큼 검은 정장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다니는 소위 ‘상사맨’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드라마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수많은 직장인들이 바쁘게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미생 애청자라면 원 인터내셔널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장소로 입을 모아 ‘옥상’을 외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외부인에게는 지하 2층에서 지상 2층까지의 공간만 개방한다. 그렇지만 아쉬움을 달랠 공간은 존재한다. 서울스퀘어 2층으로 올라가 지상 주차장 쪽으로 빠져나오면 시민참여공원에 갈 수 있다. 장그래의 동료인 ‘안영이’ 에피소드에 종종 나오던 장소로 미생을 즐겁게 본 사람이라면 분명 이곳도 꽤나 반가울 것이다. 

 

“내가 열심히 했다고. 아니.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에 나온 거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 뿐이다.”

▲서울스퀘어 입구
▲서울스퀘어 입구

1화 마지막 장면에 삽입된 장그래의 독백 마지막 대사다. 장그래는 요즘 시대의 보기 드문 청년이다. 고등학교는 검정고시. 대학은 나오지 못했다. 할 줄 아는 외국어도 없다. 자격증은 하나 있다. 컴퓨터 활용 능력. 장그래를 처음 만난 ‘김동식 대리’는 스펙이 전혀 없는 장그래를 ‘보기 드문 청년’이라 불렀다.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이 사회로 내보내진 그에게 인턴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다. 낙하산으로 인턴 자리에 들어왔기 때문에 동기들에겐 따돌림 당하고 상사에겐 무시당한다. 어쩌면 낙하산이기에 이런 취급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살짝 엿본 시청자의 입장에선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사실 장그래는 어릴 적부터 바둑 기사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매번 프로 입단의 문 바로 앞에서 좌절하게 된다. 장그래는 자신이 바둑 기사가 되지 못한 까닭으로 자신의 노력을 탓한다.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내지 못한 것이라고. 정말 열심히 하지 않았던 탓일까. 매일 새벽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와 기원으로 향하고 밤샘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인 캄캄한 밤에야 집에 돌아왔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바둑에 관한 글로 가득한 공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 입단에 실패했다. 운을 탓하지 않았다. 가난한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장그래는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다. 매 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만약 정말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거라면, 그땐 버티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밤샘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침마다 내가 마주쳐야 했던 익숙한 풍경. 표정도, 옷차림도, 걸어가는 방향조차도 일사불란하리만치 나와는 정반대였던 사람들.”

“이곳에서도 나는 변함없이 혼자였던 거다. 그리고 모두가 다 아는 그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다.”

▲영업3팀의 단골 회식장소
▲영업3팀의 단골 회식장소

다음으로 향한 곳은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의 단골 회식 장소이다. 직장인들에게 ‘회식’이란 무엇일까? 기자는 아직 경험해본 적 없지만, 왠지 귀찮을 것이란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의 회식을 싫어한다. 하지만 장그래의 입장에서 회식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보통의 이들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인턴 시절 장그래는 낙하산이라는 이유로 팀 내에서도 외면받는다. 심지어 일명 딱풀 사건으로 억울한 오해를 받기도 한다. 마침내 영업 3팀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 후 함께한 회식은 장그래에게 얼마나 큰 소속감을 안겨주었을까?

 

“제 노력은 쌔빠진 신상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조건 열심히 하겠습니다.”

 

혼자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회사에서, 항상 남들과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온, 초등학교, 중학교 이후론 어딘가에 속해본 적 없던 장그래에게 ‘회식’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언제나 그랬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기원에 가는 길에도,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무리 빨리 이 새벽을 맞아도 어김없이 길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들이 아직 꿈속을 헤맬 거라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나보다 빠르다.”

▲장그래의 출퇴근길로 나오는 창신동의 한 골목
▲장그래의 출퇴근길로 나오는 창신동의 한 골목

마지막으로 장그래가 사는 동네의 촬영지인 창신동에 갔다. 창신동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달동네다. 기자는 장그래의 퇴근길을 경험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늦은 저녁에 창신동에 갔다. 밤의 창신동은 아주 조용하다. 그리고 매우 어두우며 골목이 많아 복잡했다. 골목에 들어선 초기엔 약간 무섭기도 했으나 높은 경사의 계단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니 이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매일 이 길로 출퇴근을 하는 장그래에 대한 존경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말 더는 못 가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눈앞에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아마 장그래가 매번 보았을 풍경일 것이다.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펼쳐지기에, 가빠진 숨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늦은 밤의 창신동은 매우 고요하다. 집 안의 소리는 쉽게 밖으로 새어나온다. 아마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탓일 거다. 장그래의 집을 찾으러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은 대화 소리도 쉽게 들리는 이곳에서 장그래는 얼마나 많은 슬픔을 홀로 묵묵히 참아냈을까. 행여나 누가 들을까봐. 바둑 기사로 입단하지 못했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슬픔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자리에 누우셨을 때도, 자신의 꿈을 포기한 채 기원에서 짐을 싸 돌아왔을 때도 그는 그의 방식대로 묵묵히 견뎌왔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어.”

장그래는 직속 상사인 김동식 대리에게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었다. 그날 돌아가는 길에 김 대리가 한 말이다.

 

“그럼 성공은요?”

“음.. 자기가 그 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닐까?”

 

장그래는 져도 기분이 좋았던 바둑이 있었다고 답했다.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에서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건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는 점. 김 대리의 말은 장그래가 바둑을 두었던 과거가, 결국 프로 입단의 문 앞에서 좌절했던 과거가 단지 실패했던 과거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과거를 드러낸 장그래와 그런 직장 동료를 따뜻하게 받아준 김 대리의 모습은 TV 밖 수많은 장그래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당신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다가오는 문을 하나 연 것뿐이라고.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미생이란 단어는 ‘아닐 미’에 ‘날 생’자로 아직 살아남지 못한 자라는 뜻이다. 바둑 용어로 살아 있지 않은 돌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죽은 돌이 아니라 완생의 여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 기자는 19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자는 장그래의 입장에 서서 드라마를 보았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게 되면 김 대리의 입장에 설 때가 올 것이고,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오 과장, 김 부장의 입장에서 드라마를 보게 될 날도 올 것이다. 지금 기자의 눈으로 볼 땐 마냥 어른인 그들이지만 모두가 미생의 삶을 살고 있다는 오 과장의 말을 이해할 날이 언젠가 오리라.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왜 이렇게 처절하게, 치열하게 바둑을 두십니까? 바둑일 뿐인데. 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바둑이니까. 내 일이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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