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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신기하고 쓸모있는 국제법:WTO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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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기술의 발전과 교통‧통신의 발달로 인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 발생하는 일도 마치 이웃에서 벌어진 일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전 세계가 하나의 마을처럼 가까워진 현실을 우리는 지구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사회에서도 국가는 국제관계에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행위자이고 국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간의 협력은 매우 긴요하다. 국가들은 국제문제를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국제기구를 창설하고 이를 통해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기도 한다. 최근 신문이나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국제기구 중 하나는 아마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가 아닐까 싶다. WTO는 국제무역 규범을 형성하기 위한 협상의 장을 제공하고, 무역분쟁이 발생할 경우 그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며, 여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국제무역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경제활동의 상당부분을 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WTO와 같은 국제기구의 기능과 역할을 이해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WTO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아는 학생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따라서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WTO의 역사와 설립배경에 대한 글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1. GATT에서 WTO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44개국의 대표단은 전후 경제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우즈(Bretton Woods)에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국제통화 및 금융질서를 위한 국제기구의 창설이 논의되었고, 그 결과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와 국제부흥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동 회의에서 무역에 관한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지만, 많은 국가들은 브레트우즈 체제의 세 번째 축으로서 국제무역을 다루는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UN의 전문기구로서 국제무역을 다루는 국제무역기구(International Trade Organization, ITO) 설립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어 약 50여 개국이 협상에 참여하였다. 1947년 11월 21일 쿠바의 하바나에서 열린 회의에서 ITO 설립을 위한 중요한 전기가 마련되었고  마침내 1948년 3월 ITO 헌장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ITO 헌장은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로부터 외면받았다. 특히 미국의 트루만 행정부는 ITO 헌장의 비준을 위한 의회의 동의를 받는데 실패하였고, 결국 1950년 공식적으로 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은 ITO 체제가 출범하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ITO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한편 ITO 설립과는 별도로 국가간 관세를 낮추기 위한 논의가 1945년 12월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각국의 보호무역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반성에서, 협상에 참여한 국가들은 무역자유화를 통해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초기 협상에는 15개국이 참여하였으나, 1947년 10월 30일 협상이 타결되었을 때는 참가국이 23개국으로 늘어났다. 각국이 관세 장벽을 낮추기로 한 합의(관세 양허)는 1948년 6월 30일부터 효력을 발생하였으며, 이로써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GATT) 시대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1948년부터 1995년 WTO가 설립되기 전까지 GATT는 국제무역규범으로 기능하면서 한편으로 국제무역을 관장하는 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불완전한 형식이었기에 국제무역을 관장하는 국제기구를 설립하기 위한 시도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추진되었다.  

 

GATT 시절 회원국들은 관세 장벽을 낮추기 위한 협상 라운드를 계속하여 이어갔다(각 협상 라운드별 참가국과 주요 의제는 아래 표 참조). 그러나 국가간 무역규모가 늘어나고 거래가 활성화됨에 따라 무역에 있어서 관세 뿐 아니라 비관세 장벽도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1973년부터 1979년까지 계속된 도쿄 라운드에는 102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비관세 장벽에 관한 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루었다. 그 결과 보조금, 기술무역장벽, 수입허가절차, 정부조달, 관세평가, 반덤핑 등에서 일부 국가들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모든 회원국의 동의를 얻지는 못하였고, 일부 선진국들간에서만 이루어진 합의였다. 따라서 이를 협정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코드(code)’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라운드에서 일부 국가들간에 합의된 문건들은 추후 협상 라운드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실제 협정으로 발전하였다.  

 

2. 우루과이 라운드

1986년 9월,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에서 새로운 협상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협상은 기존 상품무역에만 적용되던 규범 이외에 서비스 무역과 지식재산권 등 새로운 분야를 규율하는 규범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GATT 체제의 불완전성을 보완하여 국제무역을 관장하는 기구의 설립을 중요한 목표로 하였다. 이렇듯 세계무역기구는 우루과이 라운드(Uruguay Round) 협상의 결과물로 탄생하였다. 1994년 4월 마라케시에서 열린 각료회의(Ministerial Meeting)에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으며 당시 GATT 회원국 중 123개국이 최종의정서(Final Act of the Uruguay Round)에 서명하였다. 최종의정서에는 WTO 설립협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WTO가 1995년 1월 1일에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WTO 회원국수는 1995년에 112개국에 머물었으나, 2022년 9월 현재 164개국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2001년에는 중국이 WTO에 가입하였으며, 2012년 러시아가 WTO에 가입하였다. 잇따른 거대 경제권의 WTO 가입에 따라 WTO 회원국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증가하여, 2015년에는 세계무역에서 WTO 회원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98%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WTO를 떠나서는 국제무역에 대해 논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다음호에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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