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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자아(自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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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대개 비슷한 이유로 좋은 글이지만 나쁜 글은 저마다의 이유로 나쁘다. 깨어 있는 사람들이 좋은 글을 읽기 원하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보편적 진리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좋은 기사란 무엇일까. 신문사에 들어오기 전, 기자가 생각하는 좋은 기사란 독자들이 만족할 만한 내용을 잘 전달한 기사였다. 하지만 기자라는 직함을 얻은 후 반년이 지난 지금 좋은 기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했다. 원래 독자의 입장에서 기사를 봤다면 지금은 기자 입장에서 기사를 바라보게 됐다. 여기서 도출된 한 가지 생각이 있다. 기자는 본인의 글에 ‘자아(自我)’를 가져야 한다. 즉, 본인의 기사 내 논조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기사 안에 기자의 자아를 갖기란 쉽지 않다. 기사 특성상 사설과 같은 부류의 기사를 제외하면 기사 내 주관성은 거의 배제되며, 신문사 특성상 기자는 암묵적으로 조직이 정한 논조를 따른다. 그렇다면 글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논조를 담을 수 있을까?

모든 기사는 수정하는 과정에서 선배 기자의 피드백을 거친다. 피드백 과정에서 본인의 주관적 의견이나 화려한 표현은 묵살당하기 십상이다. 일례로, 기자는 신문사에 입사한 후 보도기사 작성 연습을 했다. 첫 기사 작성인 만큼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기사 작성에 임했고, 나름대로 괜찮아 보이는 글을 완성했다. 학창 시절부터 글재주가 좋은 편이라고 평가받던 몸이라 자신의 글에 큰 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기자의 글에 그어진 취소선과 수정을 요구하는 빨간 글씨뿐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글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돌아온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피드백을 받은 후 기사를 퇴고하고 보니, 이 글은 기자가 작성한 글 같지 않았다. 남이 재단하고 수정한 기사는 결코 온전한 자신의 글이 아닌데, 기사에 자신의 이름을 넣을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고, 기사의 핵심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전문가는 기사의 중요성을 무엇이라 생각할까? 이번 여름방학에 신문사 기자들은 단체로 정준희 교수의 강연을 들은 바 있다. 정 교수는 대학신문의 논조는 주로 편집권자의 뜻을 따르며, 기사의 핵심은 균형성·객관성이라고 전했다. 균형성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 생각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이상적 형태의 삶의 자세라고 봤다. 즉,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중간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기사 작성도 중용과 같다. 너무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은 기사 작성이 이상적 기사다. 돌이켜보면 지난 기자 생활은 극단적이었다. 피드백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마감 기한 엄수에 대한 압박이 맞물려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했다.

그렇다면 중용을 지키는 선에서, 기자는 기사 안에 어떻게 자아를 녹여낼까?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보면 기사에서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개 글을 읽다 보면, 어떤 부분이 핵심인지 파악할 수 있다. 기사도 마찬가지다. 기사 안에서 내용의 경중을 조절하는 것이 핵심이다. 즉, 객관성을 지키는 선에서 기자가 생각한 핵심을 글에 담아내는 것이다. 자아란 기자의 개인적 논조·주관을 경중 조절을 통해 표현하되 기사의 중용적 흐름을 유지하는 ‘기술’이라 평가하고 싶다.

기자가 된 지 반년이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많은 글을 작성하고 읽어봤음에도 기사 작성은 매번 어렵게 느껴진다. 수습기자 시절에는 막연히 객관적 태도로 글 작성에 초점을 뒀지만, 준기자가 된 지금은 이에 더해 나만의 자아를 기사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객관성을 잃은 기사에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기자 의식의 타당성에 강변하는 꼴이므로 객관성과 주관성의 중도적 태도를 견지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기자에게 자아란 딱딱한 신문의 객관성에 도전하는 일종의 합법적 반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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