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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부(安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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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안부(安否)를 물어 그 사람이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곤 한다. 안부는 친근함의 표시, 보고 싶은 순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기에, 안부를 묻는 인사는 언제나 반갑다. 대학교에 들어온 후 학창 시절 친구들이 안부를 묻는 연락을 보내왔을 때 역시 그러했다. 반가운 마음을 담아 기자의 안부를 전하려는데, 문득 “내가 지금 정말 편안한가?”싶었다. 그리고 한동안 깨달은 것은, 친구에게 “잘 지내지”라고 보낸 답장들은 사실과 달랐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본인의 안부를 물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기자는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아파서 보건실에 갔던 기억이 별로 없다. 아주 건강했구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아파도 그냥 참았던 적이 참 많았다. 머리가 아플 땐 “밤에 자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넘기고, 배가 아프면 “아까 빨리 먹어서 체했나 보다” 하고 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수업을 듣다가 한번은 눈앞이 하얘지고 제대로 앉아있기 힘들 정도로 속이 메스꺼웠던 적이 있었다. 어지럽고 식은땀이 흐르는데 그때도 주먹을 꽉 쥐고 참다가 수업이 얼마 안 남았을 때쯤에야 계단 난간에 의지하며 보건실로 내려갔다. 선생님께선 입술이 너무 창백해서 놀랐다고 하셨다. 나는 친구 손이 종이에 살짝 베여도 빨리 보건실에 가라고 말할 줄 아는 입과 반창고를 찾을 줄 아는 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내가 아픈 건 시도 때도 없이 외면해버렸다. 

성인이 되고, 새로운 환경,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시도하기 시작했다. 20대를 살고 있는 청춘들이 대부분 경험하고 있을 그 성장의 과정에서 깨달은 ‘나의 안부’는 너무나도 불안했다. 기자의 손에는 늘 땀이 많았고, 소화는 늘 잘 안됐고, 감정 그래프의 세로폭은 서울 한복판의 초고층 빌딩만큼이나 들쭉날쭉 높았다. “에이 괜찮아, 별거 아니야.”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겼던 나의 안부였는데. 그렇게 참아가며 나조차도 속였던 나의 안부를 최근에서야 제대로 듣게 된 것이다. 

나의 안부가 불안하다는 걸 알고 나선 기자를 편안하지 않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고민했다. 그 불안감은 대부분 기대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스로 부여하는 기준은 너무나 높았고, “늘 발전적이어야 해. 성장해야 해”라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욕심 가득한 미래만을 그리다 보니 매 순간순간 기자의 현재는 미래에 잠식되어 있었으며, 그 높은 기대와 욕심을 따라잡지 못하는 현재는 괴롭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놀고 싶은 현재의 주인인 나 역시 좋아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스스로를 좋아하지 못하니까 주변에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도 쉽지 않았다. 나에 대한 애정을 갖지 못한 내 모습은 나의 자신감을 떨어뜨렸고, 스스로 끊임없이 검열하고 통제하는 습관 때문에 또 불안했다. 사실상 불가능한 완벽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강박, 그와 다른 현실 간의 괴리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무기력감을 불러왔었다. 

기자와 같은 성향을 가져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미래보다는 매 순간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그냥 이미 그동안 잘해왔다고 다독여 주자. 본인을 아예 외면해버리거나 힘들게 뭐가 있냐고 몰아세우지 말았으면 한다. 어떤 이유로든 뭔가 힘이 들거나 무기력하다면 본인을 충분히 돌아보았으면 한다. 아프면 바로 보건실에 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걱정하지 말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근래 계속 나의 안부를 물어본 기자는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었다. 이해하고, 내려놓고, 사랑하는 법도 조금은 배웠다. 그러니까 다들, ‘나의 안부’를 좀 시도 때도 없이 충분히 묻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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