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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 <여인의 향취>, 1973, 지본채색, 28x38.5cm

박물관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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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숙자, <여인의 향취>, 1973, 지본채색, 28x38.5cm
▲ 이숙자, <여인의 향취>, 1973, 지본채색, 28x38.5cm

“조선 여인의 향취가 가득한 민예품 및 민속품에서 미의 본질을 찾았다. … 현대적 감각으로 다룬 이 작품들은 그의 풍아(風雅)와 운치로써 이미 과거가 아니고 현재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지향 이숙자의 작품에 대하여 미술평론가 석남 이경성이 남긴 평이다. 1967년부터 1978년까지 홍익대학교 초대 박물관장이었던 이경성은 제자인 이숙자의 첫 개인전 《이숙자 한국화전》(1973)에 서문을 써주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여인의 향취>는 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숙자는 1963년에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여 천경자에게서 채색화를, 최순우, 이경성, 이일에게 이론을 배운 동양화가이다. 이숙자는 “채색 한국 화가”로 자신을 소개할 만큼 채색화가이자, 한국화가로서 정체성을 갖는 작가다. 이 작품을 제작하던 1970년대에 작가는 박생광과 천경자의 화실을 다니며, 두 작가에게서 분채(粉彩), 암채(巖彩)와 같은 다양한 재료로 채색화를 그리는 방식 등을 지도받았다. 이렇게 이숙자가 채색화에 관심을 두었던 1960-70년대에 동양화단에서 채색화는 ‘일본화의 아류’로 인식되어 수묵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시기임에도 작가는 고구려 고분벽화-조선시대-이당 김은호로 연결되는 채색화의 맥락을 짚어내는 석사학위논문 「韓國近代 東洋畵의 硏究 : 韓國畵 定立을 위한 基礎調査」(1971)을 발표하였다. 또한 이숙자는 1973년 첫 개인전에서 전시 제목을 한국화로 명명하였다. 당시에 신진 작가였던 그녀의 작품을 작가가 직접 한국화로 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일례로 이숙자의 회고에서는 한국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화단에서는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엇갈렸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일본화가 아닌 한국화로서 채색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었다. 이렇듯 이숙자가 채색화에 관심을 두고 ‘한국성’이라는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작가가 채색화에 큰 애착을 갖고 채색화가이자 한국화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숙자의 작업세계는 크게 규방소품, 보리밭, 이브, 민족혼의 재생-훈민정음, 신토불이, 백두산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규방 소품을 그려낸 작품은 이숙자의 대표작인 보리밭 이전에 제작된 초기작이다. 1973년 첫 개인전 《이숙자 한국화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규방에서 사용하는 소품들을 주제로 삼았다. 이것은 자신의 혼례 시 주고받았던 예물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또한 이숙자는 작업을 위해 비녀, 주머니, 색상자, 보자기 등의 민예품을 수집할 만큼 규방 소품은 작가의 취향에 잘 맞았다. <여인의 향취>의 주제가 되었던 골무는 실제로 작가의 시어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신 것이었다. 이렇듯 이숙자의 작품에 등장하는 규방 소품들은 작가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작가는 단순히 과거에 묶여있는 물건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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