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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홍대 학・예술상(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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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

최우수상 오지환(자율3)

「둥근 어항 안에는 둥글게 도는 것들이 있다」

우수상 임혜준(섬유미술·패션디자인2)

「대탈출」

 

최우수

「둥근 어항 안에는 둥글게 도는 것들이 있다」

냉장고를 열자 금붕어가 방안으로 쏟아졌다. 발가락이 금붕어에 닿으면서 다른 색깔이 되
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무엇이 달라졌는지 확인했다.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아주
다른 색이 되었을 뿐. 그런 마음으로 나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힘을 주었지만 힘이 느껴지
지 않을 만큼 약하게, 문은 소리 없이 밀려 닫혔다.
아버지는 일을 나갔지만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로 삼 일
째. 집은 고요하다.
발가락을 확인했다. 금붕어는 없었다. 냉장고를 다시 열었다. 아무것도 쏟아지지 않았다.
금붕어를 주워 놓을 걸. 주워서 차곡차곡. 다시 채워 넣으면 그만인데. 채워 넣지 않아서
쏟아질 금붕어가 없네. 냉장고를 닫았다. 장을 본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나가야겠다. 휴대
폰 메모장을 켜 금붕어를 적었다 지웠다.
눈이 시렸다. 바람이 부는 것 같은데 바람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원래 보이지 않는다
는 걸 깜빡했다. 눈을 깜빡이며 아는 것들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깜빡. 깜빡. 세상이 사라
졌다. 세상이 나타났다. 너무 빨리 세상이 변해서 머리가 아팠다. 눈을 뜨고 주머니에서 휴
대폰을 꺼냈다. 오전 여섯 시 일 분. 정각에 세상을 보고 싶었는데. 정각이 지나버렸다. 거
리가 하얀 벽같이 느껴졌다. 온통 눈이 부시는데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돌아가야 할 곳을
잃었는데 벽을 돌아서 갈 곳이 없었다. 걸음을 돌리고 싶지 않은데 돌릴 수밖에 없었다. 조
금 쌀쌀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금붕어를 떠올렸다. 냉장고를 떠올렸다. 까만 방이 보이고 냉장고
문이 보였다. 빛이 쏟아지려다가 금붕어가 방안으로 대신 쏟아졌다. 아주 빛나는 금붕어였
다. 어항이 없어 속상한 밤이었다. 다음날 나는 어항을 사러 가지 않았다. 변기에 금붕어를
쏟아 부었다. 금붕어가 변기에 쏟아졌다. 정강이에 물이 튀었다. 소름이 돋았다. 변기 안에
빠진 금붕어가 허우적댔다. 헤엄치지는 않았다. 맹세컨대 금붕어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
다. 금붕어는 세상을 뒤집으려다가 자신이 뒤집어졌다. 뒤집힌 채 빙글 떠돌았다. 배를 내
놓은 빛 덩이가 변기 안을 빙그르르. 물을 내렸다. 빙글빙글. 선명한 빛이 구멍 속으로 사
라졌다. 물소리는 아버지의 발소리만큼 컸다.
아버지는 발이 작았다. 아버지는 그게 싫다고 했다. 남자답지 않다고. 부끄럽다고.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발이 커도 부끄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평생을 아버지의 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신는 신발은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신발을 끌며 걸었다. 작은 발을 감
추려 한 탓이었다. 아버지가 신은 큰 신발은 바닥이 매끈했다. 언제 한번 아버지가 껌을 밟
은 적이 있는데, 그때 아버지가 참 부끄러웠다. 커다란 신발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아버지
의 얼굴이 매끈한 밑창과 다를 게 없이 닳아버려서, 나는 멈춰 선 아버지를 내버려두고 빠
르게 걸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신발 바닥에 붙은 껌이나 보고 있었겠지. 그런데 아버
지는 얼마나 오래 보고 있었을까. 어쩌면 아버지가 오래 본 건 껌이 아니라 커다란 신발이
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날 언제 집에 들어왔더라. 기억할 수 없어서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자 냉장고가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갔었나. 냉장고에 다가가 문을 닫았다.
조금 힘을 주자 문이 밀려 닫혔다. 잘 닫히는 걸 보면 잘 닫지 않은 게 분명했다. 냉장고를
열어 두면 좋을 게 없다. 방안을 차갑게 만들 수도 없으니까. 문득 방안이 오싹해진 것 같
았다. 괜한 생각이라 생각하면서도 몸이 떨렸다. 피부에 솟아오른 돌기들이 기분 나쁜 무늬
로 보였다. 뜨거운 물로 씻고 싶었다. 화장실에 갔다.
바다 냄새가 났다. 우리집은 바다에서 수 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인데. 바닷물이 우리집
화장실로 밀려든 걸까. 기어코 수돗물을 밀어낸 걸까.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화장실을 둘러보는데 변기 속이 유난히 밝았다. 금붕어가 돌아온 건가 싶어 고개를
숙여 변기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공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하얀 공은 배를 부풀린 새끼 복
어가 되었다. 곧 터질 듯 부푼 게 멍청한 사람이 화를 내는 모습 같았다. 물을 내리려다가
바닷물이 흘러넘칠까봐 물을 내리지 않았다. 내버려두기로 했다. 변기 뚜껑을 내려 새끼 복
어를 변기에 가두었다. 화장실을 나오고 불을 껐다. 변기 안은 밤바다.
하루는 이제 시작인데 뜻대로 되는 게 없는 하루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가로로
놓인 침대에 세로로 누웠다. 발바닥이 방바닥에 닿았다. 차가웠다. 역시 방이 차가워졌는데
이건 냉장고 탓이었다. 냉장고는 열어 두면 에어컨이 되나 보다. 문득 침대째로 떠밀려 가
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발이 바닥이 아니라 바다에 닿아서 발장구를 치면 침대가 나
아가는 그런 상상을, 눈을 감고. 발을 힘껏 움직였다. 철썩, 하고 수면을 내리치고 이내 잠
기고 싶었는데, 발바닥이 얼얼했다. 얼얼해서 조금 씁쓸해졌고, 그건 아버지가 신발을 크게
신은 탓이었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한마디를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아버
지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는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을까. 아버지는 나를
버릴 수 없는데, 나는 아버지를 버릴 수 있고, 그런데 왜 나는 버려진 기분이 된 건지, 골
똘히 고민하려 했지만 골똘해지지는 못했다.
어둠 속에서 도어록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의 봄이었다. 언니와 공항철도 일반열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다가 공항을 가지 않기로 했다. 언니의 어금니가 더 이상 아드득거리지 않는 걸 언니가
더 이상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의 어금니가 아드득거리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언니의 어금니는 종종 아드득
소리를 냈다. 그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언니는 그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
고, 나도 그게 나쁜 소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니에게 매번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아버지가 반찬 투정을 부릴 때도 언니는 군말 없이 어떤 반찬이든 입에 넣기 바빴다. 일요
일이면 언니는 도보 오 분 거리의 성당에 오전 미사를 가기 위해 식사를 빨리 끝냈는데, 그
날은 유독 언니의 씹는 소리가 시원찮았다. 물었더니 언니는 어금니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나는 어금니가 이상하다는 말이 어딘가 이상하게 들렸는데, 꼭 코끼리가 재채기하는 모습처
럼 와닿지 않았다. 언니에게 되물었다. 어느 쪽 어금니가 이상한지 묻는 말이었다. 그건 코
끼리가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재채기를 했는지 묻는 말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그래서 어딘데.
왼쪽이 이상한 것 같은데 오른쪽인지도 모르겠어. 위쪽이 이상하다가도 아래쪽이 이상한
데 그러면 온통 이상해져버린 것 같아서 정말 이상한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
언니가 밥 한 숟가락을 미처 다 씹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음식을
씹을 때 입을 열지 말라며 언니에게 큰소리를 쳤다. 아버지는 그 말을 마친 뒤 다시 턱을
움직여 소고기장조림을 씹었다. 아버지의 어금니는 언니의 어금니와 다른 궤적으로 움직였
다. 언니는 아버지를 노려보는 대신 주눅든 그늘을 밥그릇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언니의
밥그릇에 한번도 삼키지 않은 밥알이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절반 이상 남은 비슷한 회색
밥알들. 언니가 밥그릇을 들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혀를 찼다. 혀를 찬 아버지가
혀를 찬 뒤 다시 턱을 움직였다. 아버지의 입에서 콩나물대가리가 으깨졌다. 나는 내 어금
니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고자 조금 질긴 고사리나물볶음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쌉싸
름한 맛이 났다.
언니는 화장실에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언니는 오전 미사에 가
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기 때문에 오전 미사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다 먹은 밥그릇을 식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정오가 되자 언니는 방에서 나왔다. 언니는 정오를 기다린 걸까. 정오를 기다리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생각해봤지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기다려본 것들은 기껏해야
가스불 위에 올려 둔 냄비 물이 끓는 것, 아버지의 힘없는 소변 줄기가 완전히 끊어져서 아
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언니의 밤색 니트가 잘못 빨아 개 옷처럼 완전히 줄어버리는 것
정도였다. 나는 기다리는 재능이 없어서 종종 기다리는 데 지쳤다. 내가 기다려본 것들은
대부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들이었다.
언니는 기다릴 줄 알았다. 언니는 무엇을 삼켜버리면 무엇이 소화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었다. 언니는 내가 먹지 않는 피자도 오래 씹어 소화시키는 사람이었다. 밀가루로 반죽한
피자 도우가 언니의 뱃속에서 제대로 소화될 때까지 대략 72시간이 걸렸는데, 언니는 그것
도 천천히 기다렸다. 가끔 언니가 너무 많은 것들을 기다리다가 지치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
만, 언니는 어쩌면 그것마저 기다릴지도 모를 것 같아서, 언니가 얼른 지쳐버리기 바랐다.
언니의 소화 기관은 아주 천천히 소화액을 분비하면서 아주 천천히 연동운동을 했다. 그
래서 언니는 음식을 아주 잘게 씹어야 했다. 아주 잘게 씹는 언니의 어금니는 아드득거렸
다. 언니의 어금니는 오래 아드득거리지 못했기 때문에 언니는 음식을 적게 먹었다. 음식을
적게 먹을수록 언니는 점점 더 음식을 적게 먹었다. 점점 적게 먹는 언니가 먹을 게 점점
없어서, 언니의 식사는 갈수록 점점 빨리 끝났다.
언니는 말없이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언니가 소파에 앉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언니가 있었다. 기역자 소파 모퉁이에 모로 누워 잠든 아버지가 언니의 엉덩이에 밀려나 점
점 움츠러들다가 웅크린 모양이 되었다. 우스꽝스러웠다. 언니는 웃지 않았다. 언니가 웃지
않아서 나는 웃지 않았다. 웃지 않자 아버지의 모습이 더는 웃기게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의 모양은 자세히 보면 연약한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코골이 위에 언니의 울음이 앉았다. 언니의 울음은 불편하게 걸터앉아서 불편한
소리가 났다. 불편하게 나는 소리는 어떻게 들어도 불편하게 들렸다.
나는 언니가 흘리는 눈물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언니에겐 언니의 우는 모습을
앞에서 지켜볼 사람이 필요했는데 나는 언니의 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었기 때
문에, 언니가 그걸 알아채지 않기를 기도했다. 내 두 손은 맞닿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가 아
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내가 두 손을 , 맞대고 두 눈을 감았다 하더라도, 내 기도를 옆에
서 보면 단지 한쪽 손등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서, 나는 기도가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 어금니가 이상해?
응.
언제부터 이상했어?
몰라.
언니는 울먹이지 않았다. 언니는 다 큰 어른이었기 때문에 울면서도 또박또박 말을 할 줄
알았다. 나도 언니처럼 뚜렷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나는 생각부터 뚜렷한 사
람이 아니었다. 나는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 치아도 없어서 교정할 일도 없었다. 내 말이 지
금보다 더 뚜렷해질 일은 없었다. 그러나 뚜렷하게 말한 언니의 말은 오래 씹어 보면 종종
하나도 뚜렷하지 않았는데, 그건 언니의 어금니가 아드득거렸기 때문이거나 언니의 어금니
가 아드득거리지 않았기 때문인데, 나는 둘 중 무엇 때문에 언니의 말이 그런 식으로 모습
을 휙휙 바꿀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많이 생각할수록 언니의 어금니가 아드득거리지 않는 건 이상했다. 언니는 모양이 이상한
어금니도 위치가 이상한 어금니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언니는 제대로 된 어금니로 제대로 맞
물며 살아 왔다. 그런데 왜 언니는 어금니를 아드득거렸다가 이제는 아드득거리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말을 하는 걸까. 나는 점심 식사를 조금 미루기로 했다. 점심 식사를 미루면 점
심 식사 준비가 미뤄지는데, 그러면 아무도 제시간에 점심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살짝 달뜬 마음이 되었다.
언니, 오늘 점심은 점심이 다 지나서 먹게 될지도 몰라.
그럼 저녁은 언제 먹어?
저녁은 점심이 안 지나서 생각 안 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구나.
나는 가끔 너무 많이 생각해.
비행기를 타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아주 멀리 갈 수 있대.
비행기를 타러 가자.
좋아.
*
아버지는 현관문을 낑낑대며 열었다. 현관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는데, 그건 아버지의 힘
탓이 아니었고, 애초에 현관문이 쉽게 열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종종 문을
쉽게 열지 못했다.
종종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마다 아버지는 문
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가 열지 않은 문은 계속 닫혀 있었다.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면 닫혀
있던 문은 닫혀 있던 동안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열리지 않았다. 쉽게 열리지 않아서
아버지는 문을 쉽게 열지 못했다. 낑낑.
아버지가 낑낑대며 문을 마저 열었다 . 아버지의 왼손에 커다란 선풍기가 들려 있었다. 선
풍기는 오래 닦지 않아 먼지가 수북했다. 붙박이는 것들에는 먼지가 잘 쌓이더라. 먼지가
쌓이지 않는 것들은 붙박이지 않는 것들이려나. 먼지를 닦아야겠다. 날개를 먼저 닦아야지.
밥 먹었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아서 나는 아버지가 밥
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은 동안 약해져버렸는지 많이 약해 보였다. 모르지. 아버지는 원래 약한 사람이
었을지도.
선풍기 닦아 놔라.
날개부터 닦으려고요.
그래. 날개부터 닦아 놔라.
아버지가 선풍기를 현관에 놓아서 선풍기가 그대로 현관에 놓였다. 아버지는 식탁 앞에
앉았다. 아버지의 두 손이 식탁 위에 올려진 채 아버지의 응시를 받았다. 아버지는 나의 응
시를 받았다. 아버지의 두 손을 피해 식탁 위에 밥그릇과 수저를 놓았다. 탁. 아버지의 두
손이 밥그릇과 수저에 닿았다. 아버지가 식사를 했다. 쩝. 쩝. 아버지는 식사를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소파 가운데에 앉자 소파 가운데가 움푹 패었다. 움푹. 소파 속에 몸을 박아 넣고 싶었지
만 그럴 수가 없어서 그러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몸을 멈추고 숨을 쉬었더니. 옴짝달싹.
주름진 가죽에서 소리가 났다. 쩍. 쩍. 가죽이 허벅다리에 들러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쩌억. 잘각. 잘각.
소파의 가죽이 내 허벅지에 들러붙을 때 아버지의 수저는 아버지의 치아에 닿아서, 잘그
락, 쩍. 아버지의 밥그릇이 수저에 부딪혔다.
달그락달그락. 쩌억.
아버지 시끄러워요. 듣기 싫어요. 조용히 좀 하세요. 아버지의 목구멍이 점점 좁아져서
영영 닫혀버리면 좋겠다. 그럼 아버지는 밥을 삼키지 못할 텐데. 아버지, 잘 좀 씹어 봐요.
잘 씹어야 잘 삼키죠. 잘 삼켜야 잘 소화시킬 수 있어요. 꼭꼭 씹어요. 꼭. 꼭. 아버지 근
데 아버지는 삼키지 못해요. 이제 아버지 그릇도 없어요. 수저도 없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가 부지런히 턱을 움직였다. 아버지는 잘 먹는 사람이라서 아버지는 평생 밥을 먹을 테니
까, 아버지의 목구멍은 넓어질 일은 있어도 좁아질 일은 없으니까, 나는 아버지가 얼른 식
사를 끝내길 기다렸다.
쩌억. 쩍. 달그락달그락. 쩍. 달그락. 달그락달그락쩍달그락쩌억달그락달그락달그락.
*
사거리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매달은 오토바이가 좌회
전했다. 형광색 옷을 입은 사람이 오토바이를 몰았다. 하나. 둘. 셋. 빗자루와 쓰레받기와
형광색이 실린 오토바이 세 대가 모조리 왼쪽으로 사라졌다.
언니 그거 알아? 우리가 타는 지하철은 한 방향으로만 가.
우리는 한쪽으로밖에 못 가는구나.
한 정거장 전으로는 갈 수 없어서 한 정거장 전으로 가려면 다섯 정거장을 가야 해.
그럼 네 정거장만큼의 시간은 어떻게 되는데?
네 정거장만큼의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는 데 쓰여.
생각하지 않으면?
네 정거장만큼의 시간을 잃어버려.
그거 참 이상한 일이네.
그치.
신호가 바뀌자 언니가 먼저 걸었다 . 언니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언니가 한 걸음씩 멀어
졌다. 언니가 멀어져 가는 동안 나는 사라진 오토바이를 생각했다. 오토바이 옆에는 빗자루
가 가로로 달려 있었지. 오토바이 꽁무니에는 쓰레받기가 달려 있었지. 오토바이 손잡이에
는 형광색 옷을 입은 사람의 손이 달려 있었지. 좌회전하는 오토바이 세 대가 있었지. 좌회
전하면 뭐가 있더라. 좌회전. 좌회전. 좌회전…… 좌회전에 대해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좌회
전으로 가득해져버려서, 오토바이 세 대가 좌회전만 하다가 결국 한 바퀴를 빙글 돌아버리
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횡당보도를 건너는 동안 언니는 앞만 봤다. 앞만 보는 언니의 뒤통수는 둥글고 딱딱한 껍
데기 같아 보였는데, 둥글고 딱딱한 껍데기는 대체로 물렁하고 흐르는 속을 갖고 있어서,
나는 언니의 뒤통수를 쳐다보지 않았다.
언니.
언니가 고개를 돌렸다.
언니, 오늘은 구름이 많아.
언니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네. 구름이 많네.
비행기구름이 가려질지도 모르겠어.
구름에 구름이 가려질 수도 있구나.
그럴지도 몰라.
넌 계속 모르는구나.
구름이 하늘을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이 구름 앞을 지나갔다. 구름 앞에 구름이 있었다.
구름 뒤에도 구름이 있었다. 그러면 구름 속에도 구름이 있겠지. 구름은 사실 물이라던데.
구름 속에 손을 넣으면 손이 축축해지겠지. 언니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언니의 뒤통수가
보였다. 언니가 다시 걸었다.
언니는 길을 모르는데 자꾸만 앞서 걸었다. 언니가 자꾸 앞서 걸어서 언니가 앞서 걷게
내버려두었다. 언니 앞으로 지하철역이 보였다. 4번 출구로 언니가 가까워졌다. 언니가 4번
출구 앞에서 멈춰 섰다. 언니 앞으로 에스컬레이터가 보였다. 언니 옆에 서자 에스컬레이터
가 앞에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앞에 있는데 계단은 앞에 없었다.
계단은 없네.
언니가 말했다.
그러게. 왜 계단은 없지?
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니가 대답하는 대신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렸다. 언니가 대
답하지 않아서 나는 언니를 따라 에스컬레이터에 한 발을 올렸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언
니의 뒤통수가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 걸 지켜보다가 에스컬레이터에 반대쪽 발을 올리지 않
아 다리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얼른 반대쪽 발도 올렸다.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붙잡고 있
었다. 손잡이가 매끈거렸다. 언니의 정수리가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
현관에 놓여 있던 선풍기를 거실로 옮겼다. 아버지는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
가 잠들어 있어서 선풍기를 닦기로 했다. 선풍기를 닦았는데 선풍기가 작동되지 않으면 곤
란하기 때문에 선풍기를 작동시켜보고 선풍기를 닦기로 했다. 선풍기 코드가 길어서 아버지
의 목을 감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버지 목에 선풍기 코드가 몇 바퀴 감길까. 아버지가 깨
지 않게 선풍기 코드를 조심스레 아버지의 목에 한 바퀴 둘렀다. 한 바퀴를 둘렀는데 선풍
기 코드가 길어서 한 바퀴를 더 둘렀다. 두 바퀴를 둘렀는데 아직 코드가 길었다. 아버지의
목에 선풍기 코드가 세 바퀴 감기자 딱 적당한 길이의 코드가 되었다. 코드 길이가 적당해
져서 이제 플러그를 꽂기로 했다.
쩌억.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면서 아버지의 맨살이 소파 가죽에 들러붙었다 떨어졌다. 아버지의
목에 감긴 선풍기 코드가 아버지의 목을 반 바퀴 더 감았다. 아버지의 목에는 선풍기 코드
가 세 바퀴 반 감겨 있었다. 아버지가 깨기 전에 아버지의 목에서 선풍기 코드를 풀기로 했
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세 바퀴 반을 풀자 아버지의 목에서 선풍기 코드가 풀렸
다. 아버지의 목에 선풍기 코드 자국이 남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 자요?
아버지가 자고 있어서 아버지가 자고 있는지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대답을 듣지 못해서
아버지가 자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이것 좀 봐요. 이 선풍기는 코드가 너무 길어요.
*
지하철 노선도에서는 여섯 정거장만 가면 공항이었지만 공항에 가려면 열 정거장을 가야
했다. 네 정거장만큼의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네 정거장만큼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기
로 했다. 언니도 네 정거장만큼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는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었
다. 휴대폰을 꺼내서 지하철 앱을 켰다. 지하철 노선도에서 우리가 출발한 지하철역을 찾아
도착역으로 설정했다. 거기서 한 정거장 전 역을 출발역으로 설정했다. 이 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언니 한 정거장 전으로 가는 데 원래 이 분밖에 안 걸려.
이 분밖에 안 걸리는 걸 우리는 몇 분이나 걸려서 가는데?
출발역과 도착역을 뒤바꾸니 십일 분이 걸린다고 나왔다. 다섯 정거장을 가는 데는 십일
분이 걸리니까 네 정거장만큼의 시간은 구 분. 구 분씩이나.
언니 우리는 구 분이나 잃어버릴 뻔했어.
구 분이나 잃어버릴 뻔했구나.
구 분에 대해 생각해서 참 다행이야.
그러게. 이제 구 분이 아깝지 않다.
갈아 탄 열차가 지상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언니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언니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언니의 표정이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
어서 언니의 얼굴을 보는 대신 창밖을 봤다. 울타리뿐인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열차가 강을 건너는 동안 구름에 가로막힌 햇빛이 열차의 내부를 비췄다. 구름이 많아서
구름을 모조리 뚫진 못한 햇빛이었다. 하늘과 강물이 차창을 가로로 갈랐다. 절반 정도의
비율로 나뉜 서로 다른 파란색이 우중충하게 파래서, 하필 창밖을 보고 있던 언니의 얼굴도
약간은 파랗게 우중충해 보였다.
언니. 어금니가 아직도 이상해?
모르겠어.
뭘 모르겠다는 거야?
이상한지 아닌지 모르겠어. 어쩌면 이상한 게 아닌지도 모르겠어.
그 말 되게 이상하네.
그 말에 언니는 동의하지 않았다. 언니가 침묵하자 열차는 다시 지하로 들어갔다. 새카매
진 차창 밖으로 언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열차가 멈추기 위해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언니의 어깨가 내 어깨에 닿은 채 점점 기울어졌다.
내리자.
아직 아니야. 이 다음이 공항이야.
공항에 안 가.
언니가 공항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언니가 공항에 가지 않겠다고 말해서 나는 언니에
게 공항에 가자고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공항에 가지 않기 때문에 다음 역이 공항인 열차
에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출입문이 열리자 우리는 내렸다. 열차에서 내리자 반대편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기는 돌아가려고 더 갈 필요가 없네.
언니가 반대편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렇네.
우리는 그렇지 않은 곳에 살고 있네.
그렇네.
*
변기 뚜껑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변기 레버를 내리자 물소리가 났다. 쏴아. 물이 쏟아지
는 소리가 들렸다. 쏴아. 그러나 물이 내려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
는 들리는데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덜컹. 변기 뚜껑이 들썩거렸다. 변기 뚜
껑이 자꾸 덜컹거려서 자꾸만 덜컹 소리가 났다. 덜컹. 덜컹. 다시 바다 냄새가 났다.
변기 뚜껑을 열었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공처럼 부푼 새끼 복어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물을 내린 적은 없는데. 물을 내려도 물이 내려가지 않았으니까 새끼 복어
도 어딘가로 내려가지는 않았겠지. 변기 뚜껑을 다시 닫고 화장실을 나왔다.
아버지 놀라지 마요. 우리집 변기에서 이제 바닷물이 나와요.
아버지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바다 냄새가 안 나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믿게 하려면 아버지를 화장실에 데려가는 수밖에 없
는데 아버지는 꼼짝도 하지 않으니까, 화장실을 아버지에게 데려가기로 했다. 화장실로 돌
아가 뚜껑이 닫힌 변기의 레버를 내렸다. 여전히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물이 내려
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은 쏟아지지만 내려가지는 않았다. 변기 뚜껑을 살짝 들춰보
니 변기 안이 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가득 채워지는 물에서는 바다 냄새가 진하게 났
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변기 레버를 내렸다. 다시 물이 쏟
아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물이 내려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러다 변기 물이 흘러넘쳐서,
화장실이 바닷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콸콸콸콸.
바닷물이 쏟아지고 바닷물이 흘러넘치는 소리가 계속됐다. 흘러넘치는 바닷물이 어느새
발목까지 차올랐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는데 잠잠해지지 않아서
다시 변기 레버를 내렸다. 변기 레버가 내려가서는 올라오지 않았다. 변기 레버가 올라오지
않으면 변기 레버를 내릴 수 없는데, 변기에서는 여전히 물이 쏟아지고 있어서, 더 이상 변
기 레버를 내릴 필요가 없었다. 바다 냄새가 지독했다. 바닷물은 어느새 무릎까지 차올라
있었다.
아버지 이것 봐요. 이제 거실에도 발목까지 물이 찼어요. 조금 있으면 제 방에도 물이 가
득 찰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죄송해요. 선풍기는 아직 안 닦았어요. 선풍기를 돌려봐야 하
는데 돌려보지 않았거든요. 코드가 짧아져버려서 선풍기를 돌려볼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침대에 누워 방문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헤엄치는 금붕어가 보였다. 아주 밝게 빛나는 금
붕어였다. 발장구를 치자 침대가 서서히 나아갔다.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철
썩…… 그러나 금붕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대신 냉장고가, 소파가, 밥그릇이, 신발이,
선풍기 코드를 목에 세 바퀴 반 두른 아버지 주위를 빙글빙글 떠다니고 있었다.

 

최우수 당선소감

오지환(자율3)

F103-2호. 그곳으로 제 몸보다 커다란 캔버스를 들고 뒤뚱거리며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서로 다른 캔버스를 든 서로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모양새로 뒤뚱거렸습니다. 중간 크리 틱을 받는 날이었기 때문에 너도 나도 중간 크리틱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 간 크리틱을 받았고, 중간 크리틱을 받은 저는 그림을 때려치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제 몸보다 커다란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겠죠. 거기서 제 몸만한 크기의 시간들을 겹쳐 보았기 때문이겠죠. 아마 제가 제 몸보다 큰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제 몸만한 시간 들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날 저는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공교롭게도 소설가가 되겠다 마 음먹었습니다. 그 결심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착실하게 잘 나아가고 있습 니다. 다행히 그림도 다시 그리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시간과 품이 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글샘에서는 항상 많은 걸 배우고 얻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글로 행복한 날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우수

「대탈출」

사건이 발견된 건 10월의 어느 요란한 태풍이 지나간 후, 아침 9시 경.
‘신선수산’의 대게와 물고기들이 몽땅 사라졌다.
횟집 사장 김씨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시작된 수색.
별달리 특이한 점은 없었다.
갇혀있던 것들이 그야말로 몽-땅, 사라졌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근방의 감시 카메라를 전부 뒤져봤지만 태풍으로 흐린 화면 탓에 범인의 행방은 묘연.
범행 장소에 남은 것은 ‘신선수산’의 텅 빈 두 개의 수조. 그리고 수조 위에 남겨진,
큰 돌로 뭉개놓은 흰색 돈 봉투와 노트를 뜯어 쓴 듯한 쪽지 하나.
안에 든 금액은 30만원. 당연하지만 값비싼 대게와 물고기의 값을 지불하기엔 턱없이 모
자란 금액이었다. 쪽지에 쓰인 문구는,
“갑작스레 정말 죄송합니다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차액은 꼭 입금 드리겠습니다.”
©
바람이 분다. 이 길을 지날 때면 항상 그랬다.
학교 앞에는 유명한 바람길이 있다. 실상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나 알음알음 이름 붙었지,
명물이라거나 동네 주민이 모두 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좁은 골목엔 빛 분자를
응축시켜놓은 것처럼 온 세상의 바람이 갇혀있어서, 사람이 들어가면 된통 혼나고 옷이 벗
겨져 나오곤 했다. 바람이 나가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가끔은 살벌할 정도였다. 겨울이
되면 특히 심해졌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피부를 찢어놓을 듯 불었다.
하필 이 도시에 올라와서 처음 지난 골목이 이곳이었다.
“많이 춥다. 힘들 텐데, 잘 할 수 있지?”
엄마가 몸을 끌어당겨 쓰다듬어준다.
“3년은 못 보겠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내려갈게.”
항구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참 추운 도시였다.
그리고 그 추위를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시의 인상은 차가웠다.
도시는 겨울이 될 때마다 잔인해졌다. 처음 도시에 자리를 잡은 이후 다시 해가 돌아 11
월인데, 추위와 바람이 단합해 괴롭히는 통에 더 힘겨웠다. 남쪽에 위치한 고향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추위였다.
이런 추위 속에서 학년이 바뀔 예정인 나는 새로 공부방을 얻었다. 학교와 기숙사가 있는
동네엔 우리 학교 학생들이 갇힌 바람들처럼 떠돌아다녔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마주치는 아
는 얼굴들이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갇힌 신세가 다 그렇듯, 수험시기가 다 되니 다들 예민
해지고 날카로워져서 바람길에서 비명 지르는 칼바람들만큼이나 따가워졌다. 그래서 조금
멀더라도 바람들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새 자리를 얻은 것이다.
가방에 다 담기지 않는 문제집들을 팔에까지 안아 들고 새 둥지를 향해 이주했다.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스터디카페였다. 도시에 올라와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그다지 없었는데,
큰 횡단보도, 큰 길, 사람들이 웃음을 흘리는 유흥가를 지나 걷다보니 조금 슬픈 기분이 들
었다. 무표정하게 굳어버린 내 낯이 일순 어색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입김을 흩뿌리며 새 둥지에 도착했다. 짐을 다 옮기고 건물 옆에 있는 분식집에서 야채김
밥 한 줄을 사먹었다. 3500원. 이제 김밥도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됐다.
김밥 한 줄과 외로워진 사람 한 줄. 그래도 합치면 둘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새 둥지로 향하는 길엔 참 많은 것들이 있다. 겨울바람이 시려워 주머니에 손을 꽂고 다
니다보면 많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큰 사거리를 지나 대로변에 쇼핑몰을 비롯해 대형 마
트, 노래방, 식당들이 줄지어 번잡한 거리를 형성했는데. 공부하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
다.
번화한 길 중 가장 눈에 띈 것이라면 바로 횟집이었다.
큰 빌딩의 1층을 몽땅 차지하고 있는 횟집은 정말 컸다. 시곗바늘이 자정에 가까워지면
도보까지 야외석을 쳐 기분 좋게 술 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횟집에는 수조가 두 개 있는데, 한 통에는 대게들이, 한 통에는 물고기들이 있었다. 며칠
에 한 번 납품받는 모양인 수조는 주로 평일엔 넉넉했고 주말을 앞두고선 비좁았다. 때로는
너무 많은 대게가 미동도 없이, 수직으로 4줄씩 쌓여있기도 했다.
퍽 잔인한 광경이었지만 별 생각 하지 않았다. 흔한 횟집이니까. 하지만 많은 시간동안
그 길을 오가며 버텨야 하는 부담감의 몫이 커질수록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딘가 저 물고기들과 내가 닮은 것 같다고.
ª
3월 모의고사를 쳤다.
완전히 망쳤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열심히 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꾸준함을 두고 겨루는 싸움. 그런데 생활 패턴, 매일 머리로 씹어 삼키는 중요한 기출문
제 따위의 것들. 그 어느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점수는 오르질 않았다. 잠시 쉬려 숨을 돌
리는 순간 굴러 떨어지고, 더 나은 결과를 얻으려 손을 뻗으면 절벽이 무너져 내리고. 손에
잡히는 건 없는데 발밑은 까마득했다. 답답한 기분이 듦과 동시에 숨통이 조여 온다. 아득
한 저 어둠을 헤아리다보니 정신까지 아득해져 그만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요즘은 그 큰 사거리에도 바람이 분다. 분명 바람을 피해 올라온 동네였는데, 봄이 되어
새싹이 돋움하고 나무에 살이 붙으면서 바람에도 가시가 자랐는지.
따끔따끔.
봄이 찾아와도 추운 기분이 들었다. 훈기가 돌 줄 알았는데 온 몸이 차가운 느낌이었다.
봄에는 원래 바람이 일렁일렁, 불곤 했는데 왜 올해엔 유독 휘이잉, 하며, 내 귓가에만 시리
게 불어오는 걸까. 이때는 길을 지날 때 매일 수조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3월. 생명의 모든
게 태동하고 뿌리 돋울 때인데 수조 속 물고기들은 움직일 줄을 모른다. 대게들도 마찬가지
였다. 켜켜이 쌓여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번지는 화려한 색상
의 조명들과 기분 좋게 달아오른 사람들의 얼굴. 그때마다 물고기들의 눈을 본다. 무언가가
흘러들고 있었다. 나는 둔한 편이라 모든 걸 뒤늦게 깨닫곤 했다.
동그란 물고기의 눈.
단순하게 생긴 물고기의 작은 눈이, 마치 2L 오렌지 주스의 작은 출입구처럼.
그들이 전하는 무언가를 깨닫고 싶어 조급하게 콸콸 부어낼수록, 목이 말라 콸콸 부어대
는 주스의 파동이 불안정하듯, 울컥울컥 쏟아져 엉망이 되어버리는 듯. 결국 아무것도 얻어
낼 수가 없다.
아주 작은 창을 통해 울컥울컥 터져 나오려는 것은 도대체 무얼까. 내 안에서 요동치는
어떤 충동. 계속해서 걷자 빛의 방향이 바뀌며 수조의 창에 반사된 내 모습이 보인다.
그제야 문득, 나는 깨달았다. 수조에 비치는 나의 세상 또한 하나의 어항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움직일 공간도 없는 물고기들과는 다르게 우리의 달빛은 밝고, 사람들이 웃는다.
그들의 말소리, 알코올의 뜨뜻한 기운이 양 볼에 닿아오고 나는 내 두 발로 움직여 횡단보
도를 걷는다. 세상이 물고기가 아닌 우리를 비추고 나는 그렇게 그들을 지나친다. 물고기의
시선이 나를 따른다. 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인 은유를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뒷목을 따끔따끔 시린 바람이 쓸어 들어가면 속절없이.
새 둥지를 틀어도 그건 수조 끝에서 끝으로 죽을 자리를 옮긴 것 뿐. 어쩌면 세상을 비추
는 저 동그란 달도 아까 떠올린 2L 오렌지주스의 작은 입구처럼, 세상이 어항이라는 사실의
증거가 아닐까. 내가 다닐 수 있는 곳은 도시의 극히 일부. 세상의 끝에서 끝을 다닐 수 있
었다면 정말 차라리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 작은 도시에, 그것도 두 동에 갇혀
이리저리 수직왕복하고 있는 꼴이 움직이지 않는 물고기와 무엇이 다른가. 저들도 가끔 생
기 넘치던 때가 있던데. 이리저리 움직이고, 벽과 벽 끝을 왕복 해봐도 얻을 수 있는 건 이
곳이 어항 속이라는 냉정한 진실뿐, 점차 기력을 잃고 활력도 잃어 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은 날카로운 단두대와 세상 저 멀리 아른거리는 단 하나의 탈출구, 아무것도 하는 수
없이 단 하나 탈출도 하지 못하고 저물어가는 것이 나의 삶이라면…
생각이 깊어져서 꺼버렸다.
부러 잔잔한 노래의 볼륨을 키웠다.
«
“이대론 안 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도 알아요.’
이렇게 대답하진 않았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여름이 왔다. 날씨가 습하고 끈적해졌다.
동시에 6월 모의고사의 성적표가 나왔다. 더 떨어질 데가 있나 싶을 만큼 떨어졌다. 그동
안 열심히 올라왔는데, 발을 한 번 잘못 딛고 나니 나를 반기는 건 끝없는 추락이었다. 우
렁찬 장마의 시작과 함께 시험지에도 비가 내렸다. 사라져버린 20점. 시험불안이 심해져서
뒤의 2장은 아예 보지도 못 했다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했더니 친구가 울상으로 그랬다.
“어떡해…”
내 말이. 어떡해.
가족과 연락을 안 한 지는 한 달쯤 됐다. 집에 내려가지 않은 지도 1년쯤 됐다. 모두 공
부 때문이었다. 가끔 고향의 풍경이 아른거렸지만 이 부끄러운 시험지론 내려갈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한 후에만 내려갈 것이다, 라고, 그렇게 결심했기 때문이다.
시험이 완전히 망해버리고 나니 시도 때도 없이 속이 미식거리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별
로라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변명 같은 말이 끔찍하지만 정말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도 핸드폰을 봤다. 내가 이렇게 슬퍼도 세상은 웃는 모양으로 잘만 돌아갔다. 우스워졌다가,
괴로워졌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이 끔찍해서 이번엔 우울해졌다.
이렇게 아프고 나서는 결국 물고기의 처지를 빌렸다. 아프고 힘들면 성격이 나빠지고 양
심도 없어지는 법이니까 괜찮았다. 이 세상은 어항이다. 출구는 저 하늘 위 달 구멍 정도일
까. 나는 여기에 갇혀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평생 이렇
게 시험과 문제에 순종하며 살겠지. 실패한 횟감으로, 아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잔인한 삶을.
이제 횟집의 수조를 지날 때마다 말을 건다. 물고기는 눈을 통해 말하니까, 입을 움직이
지 않아도 인사할 수 있었다. ‘안녕, 친구.’ 그럼 착각처럼 욕이 들려온다. ‘기만자.’ 뒤
는 애쓰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 ‘너는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으면서, 원한다면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서. 우리들이 횟감으로 죽어가는 동안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
우리의 눈을 통해 우리의 죽음을 보면서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야?’그럼 횟집을 지
나쳐 어느 카페를 지나칠 때서야 나는 답한다. ‘너희들도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매한가지
잖아. 매일 시체처럼 우두커니. 한심하게 누워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나보고 너희
를 뭐, 꺼내기라도 해달란 말이야? 웃기는 소리.’그러자 뒤에서 울분에 찬 목소리가 외쳐
울려온다.
‘너는 몰라. 진짜 움직이지 못하는 게 어떤 삶인지. 돈 천원에 바다 행 열차를 탈 수 있
는 네놈들 처지와는 다르다고!’
나는 중얼거린다.
‘나는 못 가. 어디에도. 두 다리가 있다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스터디카페에 도착해서 항상 앉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매일같이 횟집을 지날
때면 이런 대화를 했다. 이 대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찝찝하고 불쾌해졌다. 최근 들어 말이
통하는 건 물고기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계속 사이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마지막 대화를 누구랑 언제 했더라.
시험 날이 가까워질수록 학교의 그 누구도 즐거이 말하지 않는다. 다 같이 힘드니 서로의
불안을 나눠가진다고 해소되지 않았다. 서로 같은 부담을 진 친구들이라 더 그랬다. 여기까
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건 낙사라고. 어느 밤에 모여 우리
는 속삭였다. 낙사, 추락, 실망…. 곧이어 속삭이는 소리마저 죽어 없어지며 우리는 계속해
서 고립되어간다. 교실을 둘러싼 웅장한 적막. 그 알아볼 수 없는 크기가 온몸을 짓누른다.
시험이 다가올수록 교실은 고요하고 차가워지기만 한다.
8월. 장마가 도시를 집어삼켜오면서, 도시 전체에 거대한 바람이 불었다.
우산이 뒤집어지고 얼굴에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바람길에 갇혀있던 바람들이 탈출에
성공했다. 도시 전체로 뻗어나간 성질 나쁜 바람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혔다. 우르르
르 몰려오는 비 소리에 귀가 멀 것 같았다. 먹먹해진 귀는 비가 오지 않을 때에도 고막에
비구름을 뿌렸다. 장마는 소리까지 삼키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데도 서로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쉬는 날 없이 불이 켜지는 교실의 적막 속에서 친구들은 내내 말이 없다가, 한마디씩을
툭 내뱉는다.
“비 오네. 힘들게.”
“습해서 짜증나.”
나는 이 와중에 물고기 생각을 했다. 욕을 된통 얻어먹었어도 생각이 났다. 피차 갇힌 신
세 함께 탈출할 수는 없을까. 이렇게 습하고 차가운 날이면 수조 밖에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왕 추락한다면 바다의 절벽에서 하는 편이 좋겠다고, 실없이 생각했다.
물고기의 한탄을 비웃던 나는 어느새 우리의 탈출을 상상하고 있었다.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
장마가 끝났다.
날씨가 점점 싸늘해져온다. 이제 또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망할 시험도 오고.
디데이가 줄어든다. 그런데 머릿속엔 공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온통 물고기 물고기 물고
기. 어젯밤엔 물고기를 탈출시켰다. 그젯밤엔 물고기가 걸어 나왔다. 당연히 모든 건 꿈이었
지만, 물고기와 대게들이 내 뒤에 한 줄로 서 따라오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바다로 데려
다주니 고맙다고 웃었다. 물고기도 웃을 수가 있구나. 꿈속에서도, 깨고 나서도 멍청하게 생
각했다.
시험을 앞두고 정말 쓸데없는 꿈이라고 생각했다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가…,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작게 숨 쉬듯 떠돌아 들어오는 말.
내가 꺼내는 순간 쟤들은 다 죽어. 숨을 못 쉴 테니까.
거기 있어도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괜히 내 손으로 우리를 죽여 버리는 건 싫었다.
9월이 지났다. 성적표가 하나 더 생겼다.
지난번보다 나은 점수였지만 기대하는 수준엔 못 미쳤다. 더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책장
어딘가에 끼워두고 다시 보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니 바람이 선선해졌다. 바람은 날뛰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얌전히
예의바르게 도시를 누비고 있었다. 평화로워보였지만, 전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이들
은 말이 없어지고, 나는 등 떠미는 바람 없이 정체되어있고.
폭풍전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고 이틀 후.
길을 지나며, 늘 그랬듯 수조를 봤다. 늘 그렇듯 죽음의 기운으로 고요할 수조 속을 보려
고 했다.
그런데, 그때.
수조 밖 세상을 휘젓는 게의
작고도 큰
집게발.
게는 수면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필사적으로 수조의 벽을 붙잡고, 동료들의 켜켜이 쌓인
등딱지들을 발판 삼아, 세상에 나오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 시도를 반
복해왔던 건지, 이번 시도엔 몸의 절반정도가 수면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감탄스러운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큰 횟집인 만큼 커다란 수조는 꽤 높았고, 세상 밖으
로 나오는 순간 게의 운명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추락, 그것은 고향을 향한 미
련한 낙사.
파삭.
껍질이 깨져 죽어갈 게의 모습까지 떠올린 나는 주인아저씨가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다. 아저씨는 막대기로 게를 마구 눌렀다. 게는 발버둥 쳤다.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마침내 게가 미끄러져 동료들 틈으로 쓰러진다.
나는 깊은 탄식을 숨기며 가게 앞을 지나간다.
신발 밑창에 달라붙은 죄책감이 걸음 속도를 늦춘다.
수많은 동료 게들의 눈이 내 비겁을 좇는다.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서둘렀다. 우스웠다.
탈출할 줄 모르는 발이 도망할 줄은 아는 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게들은 번갈아가며 탈출을 시도했다.
수조를 보면 다리 하나가 아등바등, 수조 벽을 긁어대는 모습을 매일 봤다.
그 움직임은 안쓰럽고 처절했다. 차라리 지금껏 그랬듯 가만히 누워있으면 했다.
물고기가 나를 본다. 게가 나를 본다. 뚫어져라.
같은 신세끼리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너는 자유로운 두 다리가 있으면서 어떻게 탈출하지
않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내 머리를 휘저어댄다.
아니야. 탈출하면 죽어. 지금보다 더 숨 막히는 외로운 세상 속에서 너흰 고향에 발도 못
디뎌보고 껍질이 으깨져 죽을걸.
그걸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아니.
언제는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모습이 한심한 듯 굴더니.
나는 침음을 삼킨다. 추락하고 싶었다. 으깨져도 좋으니 잠시만 쉬고 싶었다. 겉이 으깨지
나 속이 으깨지나 똑같았다. 추락하지 않는다고 망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고향의 품이
손짓하는 환상을 봤다. 분명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우리는 돌아가는 것을 낙
사라고 불렀다.
괴로워하며 떨어지느니 편안하게 낙하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되돌아간다고 오르는 법까지 잊는 것은 아니었다.
탈출. 탈출하자.
도망할 줄 아는 발이 탈출하는 법을 모를 리 없다.
비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가을의 태풍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렸다.
“헉, 헉.”
품에 꼴사납게 들린 흰 봉투. 습기에 젖어 잔뜩 구겨진 꼴로, 그 안에 든 것은 한 달 생
활비인 단 돈 30만원.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며 등을 떠민다.
우르르르, 쿵.
세상이 번쩍,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뇌우와 함께 초…의 강풍이 불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새벽 4시의 고요하고 캄캄한 도시에, 온 세상의 빗물과 빛이 벼락처럼 떨어진다.
수많은 나무와 건물. 매일 지났던 길이 너무나 멀고 길게 느껴졌다.
바닥에 생긴 수많은 물웅덩이, 미끄러운 아스팔트 도로 위를 전력으로 질주한다. 물이 튀
어 오르고 비가 쏟아져 내린다. 휘오오, 몰아치는 바람 소리와 우르르, 쏟아지는 빗소리에
온통 정신이 없다. 가끔 하늘은 번쩍거리며 감시카메라들을 혼란시킨다. 나는 온몸에 빗물
과 바람을 감고 한 곳을 향해 내달린다.
물고기, 게, 물고기들. 나, 우리.
마침내, 수조 앞에 도착해 그 위에 덮인 푸른 천을 급하게 걷어낸다. 후두둑, 우르르르,
귓가를 때려대는 빗소리와 물고기들. 꿈속의 장면과 같았다.
나는 마침내 웃으며 외쳤다.
“가자!”
땀과 비가 바다를 닮아 짠 냄새를 낸다. 온몸이 축축한데 상쾌하기만 했다. 물고기들은
처음부터 말 할 줄을 몰랐던 양 뻐끔댄다. 나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쪽지 한 장을 꺼낸다.
수조 위에 조금 젖은 돈 봉투, 구겨진 쪽지를 두고 주변을 두리번댄다. 그리고 곧 큰 돌 하
나를 찾아 가져온 것들을 뭉갰다.
®
사건이 발견된 건 10월의 어느 요란한 태풍이 지나간 후, 아침 9시 경.
‘신선수산’의 대게와 물고기들이 몽땅 탈출했다.
횟집 사장 김씨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시작된 수색.
특이한 점이라면 꽤 있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내내 보이지 않던 감시카메라가 담은 단 한 장면. 대게가 제 발로 수조
를 탈출하는 모습이었다.
경찰은 신기하긴 하나 대게의 탈출은 탈출이고, 분명 누군가 수조 안의 횟감들을 털어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 범인에 의해 물고기들은 이미 죽었을 거라고 여겼다.
범행 장소에 남은 것은 ‘신선수산’의 텅 빈 두 개의 수조. 그리고 수조 위 큰 돌로 뭉
개놓은 흰색 돈 봉투와 노트를 뜯어 쓴 듯한 쪽지 하나.
안에 든 금액은 30만원. 당연하지만 값비싼 대게와 물고기의 값을 지불하기엔 턱없이 모
자란 금액이었다. 쪽지에 쓰인 문구는,
“갑작스레 정말 죄송합니다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차액은 꼭 입금 드리겠습니다.”

 

우수 당선소감

 

임혜준(섬유미술·패션디자인2)

사람은 누구나 도망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와 홀로 타지 생활을 하며 고등학교를 다닐 때,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고 부단히도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달리기를 1, 2년, 숨이 턱 막히더니 주변은 정전. 그 두려운 암실 속에서 저는 절실하게, 도망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도망치면 언젠가 돌아와 다시 마주해야 하는 일. 그리고 우스운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 그렇게 답답한 마음으로 독서실을 다니던 때에, 길가 횟집의 대게는 단단한 등딱지로 수조를 등지고 매일 탈출 시도를 하고 있더군요. 그 이후로 독서실을 오갈 때마다 상상 속에서 탈출시킨 대게가 몇 마리였던지. 그 날의 목격은 제게 매일 밤 탈출의 꿈을 꾸게 했습니다.

저는 소설이 정말 좋습니다. 정확히는 제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주는 소설이 정말 좋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마침내, 꿈속의 대게들을 바다로 돌려보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힘들었던 수험생 기간, 글쓰기를 권유해주시고 제 모든 문장을 사랑해주신 담임선생님께. 저 잘 살고, 잘 쓰고 있어요. 항상 존경하고, 감사드립니다. 이런 기쁨을 나눌 기회를 주신 학예술상 관계자 분들께도 정말 감사합니다.

 

심사평

 

송민호(국어국문학과 교수)

이번 47회 학예술상에는 소설 부문 지원작이 유독 많았다. 마스크로 자신의 마음을 가리고 서로 멀리 있던 동안, 우리는 그만큼 서로의 이야기에 궁금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 하나하나의 완성도도 좋았다. 지원작 모두가 소설로서 기본은 되어 있어 자기 색깔을 내고 있는 작품을 고르느라 애를 먹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대탈출”이라는 제목의 작품, 갑자기 수조에서 사라져 버린 대게에 자기 삶을 얹어둔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수조를 탈출한 게의 명료한 인상에 비해 정작 그 삶은 별로 내비치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당선작으로 고른 작품은 “둥근 어항 안에는 둥글게 도는 것들이 있다”. 이 작품에서 가족들의 이야기는 화장실 변기를 통해 둥글게 흘러 바다로 흘러간다. ‘나’와 ‘아버지’와 ‘언니’와의 관계가 그 속에서 모습을 갖췄다가 사라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외에도 단편이라는 양식적 제약이 아니었다면 훨씬 좋았을 작품들이 많았다. 여전히, 서로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모든 작가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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