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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에 앞서 완전배상주의부터 도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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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배상은 손실의 전보를 내용으로 하며, 손해배상으로 채권자가 불이행이 없었을 경우보다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손해배상이 손실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채무불이행에 있어서 채무자와 채권자, 불법행위에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로 분류할 때, 채무자 또는 피해자의 손해배상은 제도적인 이유로 실제 입은 손해를 모두 보전받을 수 없는 구조이다. 실 손해는 발생하였지만 증명할 수 없거나 예견가능성이 없었음을 이유로 배상에서 제외되는 손해도 많다. 우리민법 제393조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통상손해를 원칙으로 하는 제한배상주의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는 통상손해는 지극히 적하지만, 예견가능성이 없는 특별손해가 더 많이 발생한 경우 불합리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통상손해는 1백만 원이 발생하였지만 예견가능성이 없는 특별손해가 1억 원이 발생했다고 한다면, 1백만 원을 배상시키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채무자나 가해자에게 비난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손해의 일부는 채권자나 피해자에게 부담시키는 구조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채무자나 가해자에게 예견가능성이 없는 손해에 대해서 배상을 명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발생된 손해 전부에 대해 비난가능성이 있는 채무자 또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가혹성을 논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채무자 또는 가해자의 변제능력을 넘는 손해배상을 강제하는 것에 대해 가혹성의 잣대를 대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완전배상의 문제는 유럽계약법원칙에서, 배상액의 감경은 우리의 실화책임법에서 찾을 수 있다. 비교법적으로도 제한배상주의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필연적인 대륙법체계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제한배상주의를 폐기하고 완전배상주의를 취한다고 해서 여타의 민법 규정과 충돌하는 것도 아니다.

민사법의 제정·개정과정은 그 이용자들의 법인식이나 사회적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법은 살아 있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 옥시크린 사건, 폭스바겐 연비조작사건 등에서 우리의 손해배상법이 시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적은 손해배상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해배상법리의 재검토 없이 곧장 징벌적 손해배상의 도입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한 법이론을 적극적인 견지에서 재검토한 후 여기서도 포섭될 수 없는 불합리가 존재한다면, 그 때서야 비로소 징벌적 손해배상의 도입을 논의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피해자가 불특정 다수인 경우 모두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고려하면, 가해자의 가해행위로써 얻는 이익이 손해배상을 상회하기 때문에 가해자의 위법행위가 근절될 수 없다. 옥시크린 사건, 가습기살균제 사건, 폭스바겐 연비조작사건, 보험회사의 소송남용 등은 좋은 사례일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이란 피해자의 권리 내지 법익침해에 대하여 악의적이거나 의도적으로 결과 발생을 용인하는 정도의 심한 고의로 불법행위를 한 경우, 한편으로는 심한 고의에 기한 그 가해자를 응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가해자 내지 다른 사람이 앞으로 그와 유사한 불법행위를 하지 못하게 억제하기 위하여, 피해자가 실제 입은 손해에 더하여 특별히 지우는 또 다른 손해배상을 말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긍정적인 면도 강했지만, 특히 배심원에 의하여 예상을 넘는 배상액을 평결함으로써 비판을 받아왔다. 만일 우리가 이를 도입한다면 배상액을 적절히 규제함으로써 부정적인 면을 일식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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