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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건축2(1)
  • 유현준(건축학부 교수)
  • 승인 2018.05.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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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성전건축

 

지난 연재에서 유대교의 예배 공간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수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기에 대규모로 집회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과거 모세의 성막이다. 이렇던 것이 이스라엘이 정착한 후 사울 왕을 시작으로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정체제가 3대째 지속되면서 세 번째 왕인 솔로몬이 비로소 돌로 성전을 짓게 된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전에는 이동 가능한 천막으로 성전을 지었다면, 이제는 움직이지 못하는 돌로 성전을 지은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사회와 경제구조가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완전히 정착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 성전은 로마의 침공으로 파괴된 후 아직까지도 재건축이 안 되고 있다. 가끔 TV에서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앞에서 랍비들이 울면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통곡의 벽이 솔로몬 성전의 기초부분이다.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은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기 마련인데도 솔로몬 성전이 크게 파괴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당시 제사집기들은 모두 금으로 되어있었는데, 로마가 침공했을 때 성전에 불이 나자 집기가 다 녹아 돌 사이로 스며들었다. 로마군은 금을 빼내기 위해서 돌을 다 들어내었고 그 과정에서 건축물이 모두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서도 제사가 주된 예배의 형식이었고, 대규모의 군중이 모여 설교를 듣는 형식의 예배는 아니었다. 따라서 대형 공간은 그다지 필요가 없었다. 이렇던 유대교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이후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한 민족의 종교였던 유대교가 전 인류의 기독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바울이라는 인물이 큰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지방에서 태어난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다소 지방은 그리스 문화와 헬라 문화가 접하는 지역으로 그 곳에서 자라난 바울은 이중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재미교포라고나 할까? 두 개의 문화권에 모두 노출되어 있어 그는 그리스 철학도 잘 알면서 동시에 랍비로부터 배운 유대교의 교리에도 능통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이 있었기에 유대교의 교리를 헬라 철학적인 사고의 틀에 담아서 유럽에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설교의 시대

신약시대에 눈에 띄는 가장 큰 변화는 제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예수가 희생양이 되어 한 번의 십자가형으로 속죄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것을 믿기만 하면 죄사함 받는 기독교 신앙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건축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과거의 성전은 동물을 잡아 제단에 피를 뿌리고 고기를 태우는 일련의 행위가 주된 예배의 방식이었는데, 예수가 전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제사 행위가 필요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 자리에는 제사를 대신하는 예수의 업적과 교리와 여러 스토리들을 전파하는 설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이 바뀌게 되면 건축의 외형 또한 바뀌는 법이다. 기독교 초기에는 워낙 로마의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무덤이 예배의 장소가 되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런 무덤 속의 지하교회에 숨어서 소수 단위로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것이 콘스탄티노플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지정하며 비로소 양지로 나오게 된다. 따라서 집회의 규모가 갑작스레 커지자 당장 인원을 수용할 만한 건축물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급한 대로 당시에 가장 큰 건물인 법정이나 상업거래소로 사용되던 “바실리카”라는 건축물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등장하는 성당의 원형이 된다. 

  공간의 구성 면에서 살펴보자. 교회의 원형은 대형 집회가 가능한 바실리카 형태의 평면에 로마시대 때 모든 신을 섬기는 공간으로 디자인된 판테온의 돔이 합쳐져 형성된 건축공간이다. 최초의 대형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이다. 하기아 소피아는 판테온에서 발전한 형식이다. 고대 로마의 신전이었던 판테온은 1개의 돔을 가진 형식이었는데 하기아 소피아는 좀 더 발전하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1개의 돔이 3개의 작은 돔으로 받쳐진 형태를 띠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회는 시대를 거듭하며 빛이 더 많이 들어오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딕성당의 원리는 간단하다. 기독교에서는 빛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 따라서 빛은 많이 비쳐 들어올수록 좋았고 이를 위해선 큰 창문이 필요했다. 큰 창문을 만드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벽이었다. 당시 건물의 지붕은 벽이 받치고 있었는데 그 벽에 창문을 크게 뚫으면 건물이 무너질 위험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플라잉버트레스”라는 장치를 통해 지붕의 하중을 옆으로 전달시켰고 결과적으로 하중을 덜 받게 된 벽에 큰 창문을 뚫게 된 것이다. 창문은 유리로 막아야 했는데, 당시 기술력으로는 유리를 완전한 투명판유리로 만들어내기 어려웠다. 유리는 작은 조각으로만 제작이 가능했고 게다가 불순물을 완전히 정화시킬 기술도 부족했다. 유리는 불순물이 들어가면 색을 띠게 된다. 예를 들어서 철분이 많이 들어가면 녹색을 띠는 것처럼 말이다. 여러 가지 불순물이 들어간 다양한 색의 작은 조각 유리는 밀랍으로 이어 붙어져 우리가 아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창조될 수 있었다. 기술력의 한계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성화가 최초의 영화관처럼 성경 장면을 보여주며 글을 모르는 신도들을 감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상상해 보라. 지금 봐도 경외감이 드는,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에 생전 본 적도 없는 총천연색 컬러TV 같이 화려하게 보이는 성화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지를. 당시에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책은 거의 수도원에서 필사를 통해 만들어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책을 구경해 보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수도원은 일종의 출판사 역할을 하며 지식이 대거 집중된 장소로서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성경을 볼 기회도 없고 읽지도 못하는 우매한 대중은 종교 지도자가 말씀으로 전파하는 이야기를 듣는 길 외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감동적인 교회 건축물, 성화와 성상, 스테인드글라스, 음악이 하나로 어우러져 교회의 권력을 증강시키는 시청각 자료로 기능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더 많은 헌금을 뜻한다. 따라서 교회의 대형화는 신앙심뿐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활발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다음 호에서 이어집니다.)

 

유현준(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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